사도행전 69강 - 설교 일시 : 12/28/2025 제목 : 기록이 생명의 말씀이 되는 날

사도행전 69강 - 설교

일시 : 12/28/2025

제목 : 기록이 생명의 말씀이 되는 날

본문 : 사도행전 13:24-31

24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26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Jew for Jesus> 영상 5분

구원의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유대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최초의 제자들의 전도의 대상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이 저절로 구원을 받는다면 왜 최초의 순교자 야고보는 유대인들을 전도하느라 목숨까지 내어놓은 것인가?

제가 뉴욕에서 미대를 다닐 때, 같은 반에 유대인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그 아이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찾아보다가 알게 된 단체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활동을 하는 Jew for Jesus와 같은 단체들이다.

유대인들을 볼 때 복장이나 안식일 등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보면 굉장히 종교적인 민족이라고 생각하는데 구약성경 이사야서의 기록에 대해 이렇게 처음 보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 놀랍다.

27절을 보면,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선지자의 말을 외우고 있으면서도 그 말을 알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예수님은 그래서 그들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꾸짖으셨다.

자, 그러면 이사야서 53장을 한번 같이 읽어보자

[사53:1-5]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가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한 예언을 기록한 것인데..

700년 후 예수님이 정확하게 속건제물로 드려짐으로서 세상 모든 죄를 감당하셨다.

제 전공이 원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믿은 후로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어서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할 수 있는 구절들을 열심히 찾아봤지만..

사실상 성경에서 예수님의 외모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은 거의 없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꾸짖을 때.. 네가 50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느냐! 라고 꾸짖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셨을 때인데.. 40도 안되었다라고 말하지 않고 50도 안되었다.. 라고 말했다는 점에서 예수님이 동안은 아니셨다는 정도..

그정도로 예수님의 모습을 언급하는 구절이 없다.

그런데, 이사야는 메시아의 모습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살아가실 때..

외모적인 매력이 조금도 없었고.. 풍채도 없었던 모습으로 무시당할만한 배경과 외모로 살아가셨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말씀을 수차례 읽어왔지만 저만치에 있는 좋은 이야기들, 

다 사실이라고 믿기는 하지만 나의 일상과는 거리가 있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경전처럼 여기고 있지는 않나?

그래서 다른 종교인들처럼 평생 열심히 읽어보려고 여러가지 노력도 해보았지만, 

성경이 실제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언어로서 내 심령을 채워주었는가?

앞서 본 영상에서는 신약성경에 대해서 적개심을 드러낸 유대인들의 모습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신약성경은 어떤 ‘금지서’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유대인 전도자는 “왜 읽지 않습니까? 영향을 받을까봐 두려운 것입니까?”

이렇게 물었다.

유대인들은 신약성경이 누군가 지어낸 가짜라고 들어왔는데, 

실제로 마음을 열고 읽었을 때..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절대로 누군가가 지어낼 수 없는 .. 하나님의 호흡이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전도방법이 복음서를 읽어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그 귀한 복음서를 사랑하고 있는가?

바울이 마주한 유대교 신자들은 그들이 매주 읽고 암송까지 하던 이사야서였지만,

정작 그 이사야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누군지 깨닫지 못했고,

가장 종교적인 열심히 있던 자들이 나서서 메시아를 죽인 것이다.

[마27:23-25]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던 이방인들이 아니라..

매년 수차례 성전까지 이동해서 정성스레 제사를 드리고,

매주 회당에 모여 구약성경을 읽고 암송하면서도 그들이 그토록 기다려온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죽이기까지 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좀 충격적이다.

어떻게 그렇게 눈뜬 맹인으로 살 수 있을까?

그런데,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안그런가?

사실상 많은 유대인들이 그냥 계속 읽기만 하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어느새 비슷해 진 것은 아닐까?

우리도 성경을 꾸준히 읽고, 묵상도 성실히 하고 있지만..

그것이 단지 지적 성취감,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는 안도감에 머물고 있다면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은 전혀 모를 수 있지 않냐는 말이다.

저는 어른이 된 후에 예수님을 믿었고, 그래서 믿음이 없이 교회를 다닌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의 지식은 너무나 모자랐지만, 제가 아는 부분 만큼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예를들어서 믿는 자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있으리라.. 하는 약속의 말씀들.. 

치유!나 귀신을 쫓는 일들을 나도 할 수 있다고 정말 믿었다. 

그래서 한번은 거리에서 막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사람들을 위협하는 노숙자를 향해서 손을 뻗어서 마귀를 쫓아 그 남자를 풀어달라고 선포하는 기도를 한 적도 있다..

어떻게 됐을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람은 계속 괴성을 질렀다. 

당시에는 왜 저의 기도가 통하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네요.. 뭐가 잘못된 건지 혼란스러워 하던 제 모습..

그 외에도..성경에는 분명히 약속하고 있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야 할 영적인 능력들이 내게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혼란스러워 했던 기억들이 있다. 

또 저를 괴롭히는 죄성에 대해서, 저의 부족한 사랑에 대해서 답답함과 실망감도 자주 느꼈다.

지금은 그때 왜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서 나타나지 않았는지 이유를 잘 안다.

아주 짧게만 답을 하자면..만약 그때 저에게 그러한 능력들이 벌써 임했다면.. 저는 아마 심각하게 타락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셨던 것이다. 이제는 훨씬 더 놀라운 일들에 대한 기도를 드릴 때 더욱 신기한 방식으로 응답을 하고 계신다.

나의 간증

제가 지난 크로스 행사 때 첫번째 몽골선교의 항공기 값 $1800 을 하나님이 어떻게 주셨는지 간증을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난 주에 또 비슷한 일이 있었고 규모는 훨씬 커졌다.

우리 교회가 타임스퀘어에 있는 장소로 갈 때 우리 교회가 그 장소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서 간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끄심을 확신하고 믿음으로 갔고.. 당시에 우리 교회가 속한 C&MA 교단에서는 Dream Incentive 라고 교회에서 복음적인 행사나, 사역의 아이디어는 있는데 재정이 부족할 때 마중물처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신청한 곳들 중에 심사를 통해 일년에 몇 곳을 지원해주었다.

당연히 교회의 랜트비를 지원해주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저희가 타임스퀘어 장소를 들어가던 주일이 마감이어서 그냥 믿음으로 신청서를 제출했다. 제가 이렇게 썼다. “우리 C&MA 교단은 타임스퀘어에서 시작하지 않았나. 우리 교회가 그곳으로 가서 예배하는 것 자체가 복음적인 실험이니 지원해 달라. 그러면 우리는 그곳에서 예배하고 전도하겠다.”

근데, 그것이 기적적으로 체택이 되었고, 우리는 지원을 받았다.

그런데, 2년 정도가 지나고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도 다시 부족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제가 올 8월 즈음에 교회 잔고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을 때 제가 이 부분에 둔감하긴 하지만.. 우리 재정을 맡고 있는 간사님이 말했던 안정권의 기준보다 한참 떨어진 것을 확인했다.

마침 그때 제가 목사님들 컨퍼런스에 가 있을 때였는데..

제 방에서 혼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를 드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올 해 선교를 비롯해 교회에 많은 좋은 변화들을 일으키고 계시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묻고 또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깨우시고, 더 담대하게 나아가라는 외침이라고 느꼈고,

그래서 토요일 밤 예배를 위한 기도회 때 제가 자주 외쳤다.

매주 우리에게 마지막 예배처럼.. 무리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하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그것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어느때 보다 더 열심히 거리찬양, 또 크로스로 주님께 예배를 올려드렸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정말 큰 임재로 우리와 함께 해주셨다.

그 과정에 있었던 하나님의 손길들은 하나 하나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리고 지난 주에 한 노부부 뵙게 되었다. 우리 교회를 함께 섬기다 한국에 간 성도의 부모님들이셨는데, 그 전에 뵌 적은 있지만 그분들의 집에 간 것도 처음이었고

사실상 대화를 나눈 것도 처음이었다.

이민 오셔서 경제적으로 참 힘들게 사셨던 이야기들.. 그런 와중에도 정직하게 십일조를 하셨고 그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풍성하게 갚아주셨는지.. 여전히 신분에 어려움이 있는 가족들도 남아 있지만 그것조차 그들을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이끌어주었고 그 외에 자녀, 사업, 건강 이 모든 것을 넘치도록 채워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감동 속에서 나누어 주셨다.

들으면서 저도 정말 위로, 도전.. 감사했다. 저를 찾아주시고 그런 대화를 나눈 것 만으로도 정말 마음이 뜨거워지는 감사한 시간이었다. 제가 만나고 있는 하나님이 그분들 삶에도 너무 비슷하게 역사하신 것이 감동이 되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수표를 한 장 가지고 오시는 것이었다.

그 수표에는 저로서는 정말 상상할 수 없었던 큰 금액이 적혀있었다.

이 금액을 저희 교회에 헌금을 하고 싶다고 하신 것이다.

정말 저로서는 전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이분들이 정말 부자이신 것도 아니고 소박하고 검소하게 사시는 분들인데..

하나님이 그분들 삶에 주신 풍성한 은혜가 있었고..

그래서 그게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인데.. 기도 중에 그걸 이 교회에 헌금하고 싶은 마음이 드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받아서 입금을 하고 교회의 잔고를 다시 확인해보니까, 재정 간사님이 원했던 안정권으로 다시 채워진 것이다. 할렐루야!

예배에서 사람을 높히면 안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겠다.

여러분도 그걸 너무 궁금해하기 보다.. 이 일의 실제적인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더 주목을 했으면 좋겠다. 그분들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저는 이번에 또 한번,

나의 신음을 들으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저는 사실 아직도 이 놀라운 기적에 대해서 계속 묵상해 보고 있다. 

단지 얼마가 채워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싶어서 그 감격 안에 머무르고 있다. 아마 평생 묵상해도 가슴을 부풀게 할 경험일거라 확신한다.

저는 이 타이밍도 기가막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알고보니 원래 저에게 연락을 주시고 만나려 했던 것은 7월 말이었던 것인데..

일이 계속 생기셔서 미루다가 올 해 가기 전에 만나야 겠다고 하셔서..

크리스마스 직전에 뵙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 크리스마스에 이 교회에 정말 꼭 핅요한 멋진 선물을 주신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때 문제가 해결된 것만 기쁜게 아니지 않나?

그것보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그 사실이 주는 기쁨은 사실 더 큰 것이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왜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가?’

더욱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에 대한 의문조차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대도, 실망도, 울부짖음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정확한 이유다.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때 그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은 믿는다고 하는데..

그 약속들이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이다.

그는 뭘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사실상 영적 맹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무엇으로 그들을 깨울 수 있는가? 즐거움으로? 슬픔으로?

[눅7:31-32]

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그래서 예수님의 메세지는 대상에 따라 아주 무서운 경고들도 있었고, 자녀에게 하듯 사랑의 노래 같은 메세지도 있었다. 비중으로 따지면 경고가 더 많았다.

그들을 흔들어 깨우시기 위함이었다.

영화를 보면 그럴 때 뺨을 막 때리면서 잠이 들지 못하게 하는데, 그건 의학적 근거가 있다고 한다. 잠이들면 신진대사가 잠이 들면 우리 몸의 대사 활동이 평상시보다 더 느려지고 오히려 덥게 느낄 정도로 환각과 몽롱한 상태가 된다. 깨어있을 때는 몸을 심하게 떨면서 체온을 높이게 되는데 잠이들면 체온은 걷잡을 수 없이 더 빨리 내려가 생명이 위험해진다.

세례요한은 눈이 감긴채 영적 맹인들이 되어 멸망의 길로 향하고 있는데도

그 사실조차 모르고 몽롱한 상태로 죽어가는 백성들을 깨우는 역할을 맡았다.

여러분의 삶에 있는 문제들은 바로 세례요한처럼 우리를 깨우는 것이다.

잘못된 길에 들어섰을 때 돌이키도록,

너무 더디게 움직일 때 더 담대히 나아가라고! 깨우는 소리!

부르짖어야 할 일들인 것이다. 부르짖고 있는가?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세례 요한이 달려갈 길을 마칠 때..’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뤄드린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이 잊혀져간 광야의 외침 같지만..

그는 인생의 목적을 다 이룬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 그리고 사도 바울, 대부분의 제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그들의 인생이 불행하게 보인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아니라

유대인처럼 현실적 종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삶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분의 삶을 참으로 성공한 인생으로 바라보지 못하면, 

그것이 무엇을 증명하는가?

우리가 여전히 잠들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몽롱한 상태로는 나 자신도 주변의 사람들도, 세상도..

환각 속에서 볼 뿐, 그 실체를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꿈도, 기대도, 기도도 다 이 세상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 그에게서 펼쳐지겠는가?

예배를 드릴 때, 성경을 펼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먼저 광야에 외치는 진지한 이 소리들을 들으며 잠에서 깨어나라.

아이처럼 겸손히 주님이 주인심을 먼저 받아들이라.

말로만이 아니라 진정 주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앞에 서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되어 내 삶의 곳곳에 들어올 것이다.

구석진 모든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일 것이다.

새해를 맞으면서 성경통독을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텐데..

그냥 읽지말고 이번에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라!

말씀 앞에 굴복하고, 순종하라.

그러면 처음에는 철썩, 철썩 나를 깨우는 찔림과 따가움도 느낄 것이다.

그렇게 살아있는 말씀을 만나고, 말씀을 진지하게 실감하고..

그렇게 성령님이 삶에서 점점 더 실제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약속들이 하나, 둘 내 인생에 실제로 펼쳐진다.

기도는 응답되고, 손을 얹으면 치유되고,

죽어가던 영혼이 펄펄 살아 뛰어다니게 된다.

교회를 다니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처럼 성경을 보고..

유대인처럼 안식일에 출석부를 찍는 종교생활로 인생을 지탱하고 있다.

심지어 유대인들을 부러워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없거나 얼마나 희미해져 있는지 증명하는 것이다.

아까 영상에서 본 것처럼, 절망에 빠져있던 한 유대인 청년이 이제는 

이스라엘에서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되어 그의 형제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다! 외치고 있다.

생명의 물은 고여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연못이나 호수가 아니라.. 강물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청년이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신약성경을 보게 하셨다.

여러분 집에도, 휴대전화에도 하나님의 초대장,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가 펼쳐지길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내용을 너머 편지를 쓰신 그분을 바라보라.

그분이 뭐라고 하시는지 그 마음을 느껴보라.

그러면 생명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언어를 넘어선 방식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그리스어 ‘그노스코’ 는 부부가 가장 말없이 친밀하게 함께 하는 모습을 표현한다.

‘하나님을 알라!’ 는 그 안다는 단어에 바로 이 ‘그노스코’를 쓴다.

우리를 더욱 가까이에서 알기 위해서 2천년 전 아기 예수로 .. 그리고 이제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교회를 성전삼고 성령으로 거하시길 원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맞이하라.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