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 부활절 예배 Manuscript Korean

2024 부활절 설교 (은빛 요양원)

일시 : 3/31/2024

제목 : 지금 내 삶에 천국을 끌어오는 예수의 멍에

본문 : 고린도전서 15:50-52

​​[고전15:50-52]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1Co 15:50-52, NIV]

50 I declare to you, brothers and sisters, that flesh and blood can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nor does the perishable inherit the imperishable.

51 Listen, I tell you a mystery: We will not all sleep, but we will all be changed—

52 in a flash, in the twinkling of an eye, at the last trumpet. For the trumpet will sound, the dead will be raised imperishable, and we will be changed.


여러분이 잘 아는 새옹지마 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변방의 한 노인과 말의 이야기다.

한 노인이 정성스레 기르던 말이 도망을 가자, 마을 사람들은 노인을 찾아와 안됐다며 위로한다.

그런데, 이 노인은 “허허, 그게 어떤 복을 가져올지 누가 압니까?”

시간이 흘러 이 말이 돌아왔는데 혼자가 아니라 다른 야생마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부러워하며 참 잘되었다고 말하자, 그 노인은 

“허허, 이게 또 어떤 화를 가져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얼마 후에 그 야생마를 타던 노인의 아들이 그만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쯧쯧거리며 안됐다고 했지만, 큰 전쟁이 나서 마을의 모든 청년들이 징집이 되었는데

이 노인의 아들은 부러진 다리 때문에 징집되지 않아서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당장 좋은 일로 보였던 것이 결국 나쁜 결과를 가져오고, 

그 나쁜 일이 다시 더 좋은 일로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한마디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판단할 지혜가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래서 지혜로운 그 노인과 아들은 행복하고 좋은 인생을 살았을까? 


이 새옹지마의 지혜는 인생에 어려운 일을 맞았을 때 상황을 나쁘게만 보지 말자! 그런 위로가 될 수는 있겠지만, 사실 그는 참 불행한 사람이다. 


그는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마음껏 기뻐하지 못했고, 나쁜 일이 있어도 원껏 슬퍼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아들이 전쟁을 피해서 살아남았다면서 해피엔딩처럼 끝난다. 

그래서 살아남은 그 아들과 노인은 영영 아프지도, 죽지도 않았겠는가?


그들은 오히려 별 기쁨도, 별 슬픔도 없이 살다 결국은 둘다 어떤식으로든 죽음을 맞았을 그들의 끝은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다.


예수님이 군인들에게 붙잡혀 가셔서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큰 두려움과 깊은 슬픔에 빠졌다. 


이 모습을 보고 어떤 선한 반전이 있을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정작 그 당사자이신 예수님은 잡혀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잠시 너희를 떠나야 하고, 그것으로 너희는 큰 슬픔에 잠기겠지만 절망하지 말아라!


나는 큰 고통을 당하겠지만, 이것은 마치 엄마가 아기를 낳으면서 목숨을 건 출산을 하는 것과 같다. 그 고통의 끝에 품에 안은 사랑스런 아기를 보며.. 기쁨이 가득한 엄마의 마음으로

너희를 다시 만날 것이다.


예수님은 별 슬픔도 별 기쁨도 없는 어리석은 지혜자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반대로 몸이 부서질 듯 아프지만, 또 벅차오르는 출산의 기쁨으로 그 뜨거운 감정을 표현하셨다.


저는 가끔 우리 아이들이 더 어렸을 때, 아장 아장 걸어다니고, 아빠, 아빠! 부르던 영상들을 보며 혼자 감상에 젖기도 한다. 돌아보면 아쉽고 그리운 날들도 참 많다.

그때 더 많이 안아줄 걸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 나이가 들 수록 그런 아쉬움들도 점점 더 많아질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 보다 떠나간 후에야, 잃어버린 후에야 더 소중함을 느끼며 그때가 되어서야 더 애절하게 사랑하길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강, 젊음, 사람들.. 부모님.. 다 그럴 것이다. 더이상 사랑을 줄 수 없을 때 더 사랑하게 되는 이 불합리한 현상은 아쉬움이라는 단어로는 표현이 충분치 않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 할 때 아쉬움과 슬픔 이런 것이 조금도 없는 곳이라고 담대히 말한다.


무슨 뜻인지 아는가?


거기서는 잃고나서야 애타는 마음으로 그제서야 사랑하는 슬픔이나, 아쉬움이 없다는 것이다. 이별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때는 사랑하고 싶은 만큼 사랑하고, 아쉬움과 후회없이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천국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아무리 좋은 일들이 많았어도, 이곳은 결코 진짜 좋은 곳이 아니다. 우리 중 일부의 사람들, 예수님을 주인삼고 영생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사실 진짜 좋은 날은 여기서의 삶이 끝나는 그날에 찾아온다.


그들에게 죽음은 Happy Ending 이 아니라, Happiest Beginning 이다.


이 땅에서의 즐거움과 기쁨도 부활의 영광에 비하면, 그 참된 기쁨에 비하면..

이 인생의 모든 날들은 사실 출산의 아픔과도 같은 시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종종 느끼는 오늘처럼 밝고 좋은 날의 기쁨이라는 것도 천국에 비하면 잠시 고통이 멈춘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저는 출산을 지켜보기만 한 사람이라 그 고통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 고통 끝에 아기를 안고 기쁨의 젖은 채 아이를 바라보던 제 아내의 모습은 생생히 기억한다.

거의 죽다 살았는데, 그렇게 태어난 아기를 보면서 원망은 커녕 얼마나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던지 그 놀라운 장면을 기억한다.


아기를 안고 눈물겹게 바라보는 모든 엄마들의 모습에 천국에서 벅찬 기쁨으로 우리를 바라보실 예수님을 미리 볼 수 있다.


부활한 우리가 누리게 될 빼앗기지 않을 영원한 기쁨에 비하면, 

지금 우리의 인생은 출산의 과정과도 같다는 진리를 만나고 나면,

오히려 너무 많은 고통은 주님이 다 받아내시고, 우리에게는 너무 조금 요구하시는 것 아닌가?

주님이 너무나 관대하시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돌지 않는가?


오늘 본문의 끝에 소망을 가진 우리는 당연히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라고 말했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땅을 사는 동안 맡겨주신 쉽고 가벼운 멍에를 지라고 하셨다.


지상에 있는 동안 우리 모두에게는 예수님을 위해 할 일이 있다는 말이다.


결국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멍에는, 예수님의 멍에!

부활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들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주님과 함께 그 일을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다.


그것은 수백명을 구조하는 위대한 일일수도 있고, 한 사람에게 작은 격려와 위로를 주는 아주 소박한 일일수도 있다. 무엇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다.


예수의 멍에를 지는 사람에게 주님이 약속하셨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 천국의 기쁨, 예수의 평강을 주시겠다. 


내게 요구하시는 예수의 멍에는 어떤 모습인가? 그 쉬운멍에 우리가 오늘 질 수 있다면, 주님은 천국의 기쁨을 지금 누리게 해줄 것이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우리는, 천국을 소유한 우리는!

지금부터 아주 소박한 기쁜 일에도 아이처럼 기뻐하고, 감사하다가,

고난을 만날 때 잠시 슬퍼하지만, 결코 그것에 함몰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부활의 생명, 천국까지 함께 갈 그 생명이 이미 우리 안에서 고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