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화목하게

에베소서 2:10-18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요약>
요나와 하나님
하나님이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셨지만 그는 도망갔다. 이스라엘의 숙적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를 회개시키려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피할 수 없었던 요나는 니느웨로 향하지만 말씀을 대충 전하며 전속력으로 성읍을 통과한다. 그러나 그의 바램과는 달리 니느웨 전체가 회개하고 요나는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달라고까지하며 그들의 구원을 견딜 수 없음을 표출한다. 니느웨가 다시 죄 짓고 멸망하기를 바랬던 요나는 성읍이 내려다 보이는 뜨거운 햇볕 아래 거처를 마련하고, 기진맥진한 요나에게 박넝쿨의 교훈을 통해 니느웨, 즉 이방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다. 선택되고 구원 받음에 기뻐했으나 이방 족속들의 멸망까지 바랬던 이스라엘을 대변한 요나는 하나님이 제사장으로 부르신 자로서 이방 땅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통로의 역할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

하나님과 이방인, 제사장이 된 이스라엘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방 땅을 이스라엘과 구분하시고 때로는 진멸하시기까지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스라엘이 더 특별하거나 숫자가 많거나 하나님이 더 사랑하셔서가 아니었다. 이방 땅에 마치 영적 전염병처럼 급속하게 퍼져나가던 우상 숭배와 타락한 문화 때문이었다. 오히려 가장 미약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인류 구원의 계획을 실천하심으로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내셨다. 그 구원의 역사 속에 이스라엘은 특별한 위치를 갖게된 것이다. 요나서에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과 이스라엘을 제사장으로 택하신 역할이 분명히 나타난다.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대신해 제사를 드리는 특별한 임무. 즉, 하나님 말씀을 보존하고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게하는 영광스러운 통로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미완의 교회, 예수로 허문 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할 때부터 그를 통해 열방을 축복하려 하셨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까지도 축복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자손으로 오신 나사렛 예수를 통해
 시작된 ‘교회’는 모든 민족들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퍼져나가고 있다.  창세기 12장의 약속은 지금도 우리 눈 앞에서 진행 중이다. 그 약속을 성취하는 일에 주님 손 잡고 함께하는 것이 교회다. 그래서 우리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때 복의 근원이 된다는 영광스런 약속과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리니'라는 말씀이 성취된다. 
이런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를 축복할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받게될 것이다. 본문 속에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된 새로운 사람은 바로 ‘교회’다. 본문 14절과 16절에서 두번이나 ‘원수’를 허물고 소멸했다 말한다. 그리스도 교회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원수로 삼는 대상이 남아있는 일이다. 주님께서 육신으로 그 원수 되는 담을 허무셨고 십자가로 원수를 소멸하셨기 때문이다.

용서와 화해하지 못하는 저주
때문에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본인 선택에 달린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시겠다고 분명히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용서 없이 화해하고, 화해 없이 사랑할 수 있겠는가? 용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옵션이 아닌 필수 요소로 신앙 생활의 시작이다. 용서는 화해와 차이가 있다. 화해는 관계를 되돌리는 것이지만, 용서는 예수님과 함께 미움과 원망, 분노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용서의 완성인 화해까지는 못가더라도 
일차적 용서는 반드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도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용서해야 용서 받고 해방된다.
 용서는 용서 받을 자격이 조금도 없는 사람한테 주는 사랑이다. 특히나 죽을 죄에서 용서 받고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핏줄된 형제를 용서하고 화목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이었으나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나님께 용서 받고 샬롬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증오와 죽음, 어둠으로 가득찬 이 세상이 본 적 없는 새로운 인류, 하나된 새로운 사람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과 진정으로 화목하게 되고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더 깊은 용서와 사랑, 자유함을 만끽하며, 묶여있던 축복들이 부어지며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