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 누리는 평안

누가복음 2:1-20
1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설교 요약>
누가복음 2:1-20은 성탄절 설교에서 주로 많이 인용되는 성경 구절이다. 예수님의 탄생이 역사적 사실임을 명확히 증거하기 때문이다. 로마는 당시 식민 통치하던 속국의 인구 조사를 통한 세금 및 병역 징집의 이익을 챙겼다.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으로 유다 지파였다. 때문에 요셉은 자신의 약혼녀 마리아를 데리고 나사렛으로부터 다윗의 출생지 베들레헴으로 호적 신고를 하러 올라갔다. 베들레헴에 머무는 동안 마리아의 해산일이 임박하여 예수님을 낳았고, 여관에 남는 방이 없어 예수님을 강보에 싸서 말 구유에 뉘였다. 이 지점에서 ‘왜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아구스도)는 예수님 탄생 시점에 호적 신고를 명했을까?’  ‘예수님은 꼭 베들레헴 에서 탄생하셨어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
구약에 미가 선지자는 주전 약 735-700년 경에 예수님 탄생에 대해 예언했다(미가:5:2) 동방박사들은 큰 별을 따라 다다른 곳에서, 그 곳의 왕 헤롯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계신지 물었다. 헤롯은 구약 율법의 선생들이자 전문가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나는지 물었다. 그들은 정확하게 미가서 5장 2절을 인용하며 베들레헴이라 답했다(마 2:5-6) 서기관과 대제사장은 지식적으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나,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누위신 예수님을 찾지도, 예배하지도 않았다. 이것을 안 헤롯은 군사를 보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헤롯의 이런 광기 어린 살육은 아기 예수님이 자신의 권좌에 위협이 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오시면 진심이 드러난다(마 10:26) 감추어진 명예욕과 탐욕이 드러난다. 실천 없는, 말뿐인 믿음과 헌신이 드러난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많은데 정작 하나님은 모른다. 반면 이런 전문가들처럼 구약 성경을 모르던 한밤의 양치는 목자들은 천사의 방문을 받았다. 천사는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고 전해주었다.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알려주었다. 학식도, 부도, 명예도 없없지만, 목자들은 단순하고 순수했다. 그들은 천사를 통해 기쁜 소식을 듣고 아기 예수를 찾으러 가자 서로 말했다(눅 2:15-16)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헤롯과 종교 지도자들에게로 먼저 보낸 점이다. 헤롯은 자기의 두 딸과 아내를 죽였으며, 자신의 삶의 마지막 즈음엔, 자신에게 충성했던 신하들을 여리고 감옥으로 보낸 잔인한 사람이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 했지만 사실 위선적 삶을 살았고, 끝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에게 동방박사들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셨다. 하나님은 먼저 동방박사들을 통해 그들의 완악하고 위선적인 마음을 두드리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서도 거절했다.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도 천사를 만났지만, 천사 같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도 죄인이었다. 그날 저녁 목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께 무릎 꿇고 경배드렸다(눅 2:20)

죄인들에게 주시는 은혜
오늘도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사람도 보내시고, 천사도 보내신다.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천사들이, 가장 초라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광야에서 밤을 지새우는 목자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의 금가루를 뿌려주거나, 대단한 보석을 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었다. 그 분을 어떻게 만나는지 알려주었다. 오늘날에도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알려주고 어떻게 그 분을 만날수 있는지 알려주는 이가 바로 천사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만족과 평안을 찾아 헤메이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 안에 있다.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면서 하늘의 영광과 평화를 말했다.(눅 2:14) 평화는 'Peace'는 평안, '땅에서 평안' 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땅에서의 평안을 얻기를 갈망하며 크게 세 가지를 추구한다. 편리한 삶, 인간 관계, 욕구 충족이다. 넓고 안락하고 깨끗한 공간은 더럽고 불편한 공간보다 마음을 한층 평안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런 외적 좋은 환경들이 지속적 평안을 보장하진 못한다. 내면에 채워지지 않는 어떤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한 평안을 위해 좋은 인간 관계를 추구한다. 인간이라면 관계를 통해 오는 관심과 배려로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누군가를 돌보면서도 내면에는 더 많은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또한 누구보다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아도 우울하고 권태를 느끼며, 만족 없이 다른 새로운 것에 탐닉하는 사람들도 많다. 식욕처럼 본능적 욕구가 충족되면 어느 정도의 기쁨과 만족이 있다. 새로운 것을 아는 것, 성취에 대한 즐거움도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평안을 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시시하고 허무해진다. 따라서 편리한 삶, 완벽한 인간관계, 본능적 욕구 충족이 어느 정도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줄 순 있어도, 내면에 근본적으로 갈망하는 평안과 만족은 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영혼에 근본적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는 건 오직 예수뿐이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 했다. '기뻐하신 사람들' 은 헬라어로 '은총을 입다' 란 의미다. 당신은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 만약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 분을 위해 살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면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그 은혜를 받아 드리면 평안이 임한다.

전쟁 중에도 누리게 되는 평안
누군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에 대해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많은 영적 싸움에 직면하게 괴고 마귀의 공격 표적이 된다 했는데 어떻게 전쟁 중에 평안을 누릴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실때 예수님은 유월절 저녁 체포직전이었다. 사단이 예수님을 죽이려 총공격을 퍼부을 때였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평안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인이 용서함을 받고 새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다 환난을 만나기도 하고, 사단의 맹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영적 전쟁 속에서도 땅에서 누리는 평안이 있다. 당신의 삶이 영적 전쟁 안에 있는가? 환란이 있는가? 그러면 반드시 하늘의 평안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전쟁 중에도 평안을 누릴수 있다. 그래서 영적 싸움이나  주님 주시는 환란을 포기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또한 평안을 누리기 위해 한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목자들처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야한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그 분의 임재 안에 있는 안식을 더 누릴수 있다.

풀어짐

요한복음 11:37-44
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설교요약>
나사로는 죽은 지 사흘이 지나 다시 살아났다. 예수님이 무덤 밖에서 나사로를 살아나오라 불러내셨을 때, 그를 장사 시 수족에 동였던 베와 수건이 얼굴에 싸여진 채로 무덤으로부터 걸어나왔다. 이 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일러 수건과 베로 싸인 그의 몸을 풀어놓아 주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살아났지만, 어떤 것에 묶여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사람은 내면에도 양면성이 있다. 선하고 평안해 보이지만, 한편  활화산처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내면의 볼케이노는 풀어짐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를 풀어주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풀어줄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는 기도로 풀어주라
아합왕과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와 죄악으로 하나님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셨다(약 5:17). 그러나 3년 6개월이 지나 엘리야에게 비를 약속하셨다. 약속을 받았음에도 엘리야는 비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비 올 기미는 0%도 없었다. 왜 하나님은 비를 약속하시고도 엘리야가 7번 기도하게 하시고, 7번째 마저도 비 대신 손바닥만한 구름만 보여 주셨을까? 이 일로 크게 세 가지가 풀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엘리야의 겸손이 풀어졌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우상 숭배하는 제사장 850명을 모았다. 그리고 바알의 제단을 쌓게 하고 그들의 신에게 구하게 했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엘리야도 자신의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간구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내린 불이 제단 나무, 제물 및 도랑물까지 모두 태웠다. 이것을 본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외쳤다. 그는 한 순간에 하나님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그 후 기도하는 것이 쉽게 응답받지 못하자, 그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고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 기도해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 내면에 겸손이 풀어지길 원하신다.

둘째. 사환의 긍정적 눈이 풀어졌다. 
엘리야가 사환에게 바다를 바라보라 할 때, 사환은 아무것도 없다고 보고했다. 엘리야가 이른 대로 일곱번을 확인하러 가면서 사환은 포기하지 않는 엘리야의 믿음을 보았다. 그리고 일곱번째도 빗방울이 아니라 손바닥만한 구름 조각 하나만 보았다. 측량 불가능하고 무한한 하늘에서 손바닥만한 구름을 본 사환의 눈은 믿음의 눈이었다. 엘리야는 그 작은 구름을 보고 아합에게 비에 막하지 않게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라 선포했다. 상황이 좋을 때는 누구나 긍정적이고 기뻐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안좋으면  부정의 심리도 드러난다. 사환은 부정적 상황에서 엘리야의 큰 소망과 포기하지 않는 긍정적 믿음과 기도를 보았다. 믿음의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낳는다. 이 때 이 것을 본 두려움에 쌓인 부정적인 주변 사람들의 소망이 내면에서 풀어지기 시작한다. 소망은 소망을 낳는다.

셋째. 선포가 풀어졌다
엘리야는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고 아합 왕에게 큰 비가 올 것처럼 미리 선포했다. 하나님은 손바닥만한 구름을 통해 엘리야로 담대히 선포하도록 풀어놓으셨다. 그리고 그 선포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주시는 단어를 붙들고 기도하라. 성령의 감동을 붙들고 선포하며 기도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선포한대로 행하신다.
예수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믿음으로 준비하고 행동하길 원하신다. 부족함과 불가능과 부정적 상황 속에서 겸손이 풀어지고, 부정적인 사람들 내면에 소망과 긍정이 풀어지고 선포가 풀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바다 같은 아름다움도 있지만, 분출하는 용암과 같은 분노도 있고 아픔도 있다. 어떤 용암은 조용히 바다로 흘러들어 육지를 만들 듯 그 삶의 지경을 넓힌다. 반면 어떤 용암은 땅을 뒤덮고 파괴하듯, 분노로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스스로의 삶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어떻게 풀어지는가의 차이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분노가 풀어질 때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기회가 된다.

하나님은 오늘도 부족함과 위기의 부정적 상황을 통해 많은 것을 풀으신다. 당신이 처한 부정적 상황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받고자  하시는 당신의 태도와 믿음과 행동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번 사우스 다코타 선교를 통해 풀어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푸시고 계신가?

차고 넘치는 행복

요한일서 4:7-12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설교 요약>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하버드대 로버트 왈딩거 박사팀의 75년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결코 부와 명예 또는 노력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성취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건 “좋은 관계’라는 사실이 그들이 발견한 가장 분명한 메세지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일보다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런 결과가 사실 조금도 놀랍지 않다. 하지만 왜 우리는 부와 명예를 위해 열심히 살면 행복해질거라는 허망한 거짓에 반복적으로 속으며 계속해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고 있을까?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시간들을 아깝게 여기고, 더 많이 벌고, 더 높은 자리로 오르는 것을 위해 우리들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걸까? 이유는 ‘죄’ 때문이라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죄가 우리에게 들어와 저지른 일이 사람간의 관계를 깨트리는 일이었다. 사람들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죄로 인해 깨어졌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깨졌고, 그 영향으로 인간 사이의 관계도 깨진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와 해결방법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바로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행복과 건강은 로버트 왈딩거 박사팀의 연구 결과처럼 우리가 맺는 '관계'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설 때에만 가능하다. 하나님과 화목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두둔하거나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행위를 극히 혐오하신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법을 바꾸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 일을 행하셨다. 악인을 의롭다 하시고, 의인을 악인으로 재판에 넘기시어 형벌과 죽음의 고통을 겪게 하셨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한 인간이 모든 인류의 가치를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이 자식처럼 지으셔서 함께 그 분의 피조물들을 관리하게 한 아담의 가치를 대신할 피조물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 아담의 모든 자손들을 다 합친 가치를 가진 존재는 창조주 하나님밖에는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두 가지 자격을 가진 유일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바르게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것이다. 단지 갈등이 없는 평화와 평안의 상태가 아니라 행복을 동시에 의미하는 화목제물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신 방법이라 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로마서 5:8

헷세드_상대방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
헷세드는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방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화목제물을 통해 죄를 짓기 전 아담의 신분과 권세를 회복했다. 이제 법적으로 신분이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관계 속에서 진정한 화목을 이루었는가? 한 집에서 최소 몇 시간을 함께 보내는 가족이 일주일에 단 몇 분 정도만 대화를 한다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화목하다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지 못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서운한 점이 있는가? 하나님이 두려운가? 어떤 계기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하게 되었을까? 기대하지 않는 마음, 마음을 터놓지 않은 태도가 그 분과의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하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 삶에 어렵고 힘든 문제를 허락하실 때가 있다. 그런 때에 하나님께 서운하고, 원망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혹시 그 계기로 인해 하나님께 등 돌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삶에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어려움을 허락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는데 그런 때에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그 분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동일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레미야 29:11

여러분 중에 혹시 어떤 시련의 기억 때문에, 응답되지 않은 기도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이제는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길 바란다. 예수님을 만나고 풀어진 관계는 셀 수 없이 많다. 진정한 화목은 하나님과 먼저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함축적이고 분명한 계명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해야 이웃과도 화목할 수 있다.

꺼지지 않는 은혜

나훔 1:1-8
1 이것은 엘고스 사람 나훔이, 니느웨가 형벌을 받을 것을 내다보고 쓴 묵시록이다.
2 주님은 질투하시며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원수를 갚으시고 진노하시되, 당신을 거스르는 자에게 원수를 갚으시며, 당신을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하신다.
3 주님은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고 권능도 한없이 많으시지만, 주님은 절대로, 죄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회오리바람과 폭풍은 당신이 다니시는 길이요, 구름은 발 밑에서 이는 먼지이다. 
4 주님께서는 바다를 꾸짖어 말리시고,모든 강을 말리신다. 바산과 갈멜의 숲이 시들며, 레바논의 꽃이 이운다. 
5 주님 앞에서 산들은 진동하고, 언덕들은 녹아 내린다.그의 앞에서 땅은 뒤집히고,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곤두박질한다.
6 주님께서 진노하실 때에 누가 감히 버틸 수 있으며, 주님께서 분노를 터뜨리실 때에 누가 감히 견딜 수 있으랴? 주님의 진노가 불같이 쏟아지면, 바위가 주님 앞에서 산산조각 난다.
7 주님은 선하시므로, 환난을 당할 때에 피할 피난처가 되신다. 주님께 피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보살펴 주시지만,
8 니느웨는 범람하는 홍수로 쓸어 버리시고, 원수들을 흑암 속으로 던지신다.

<설교 요약>
유대인들은 원래 성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지만 포로생활 이후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해서 회당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할 당시에는 5개 정도의 (에세네파, 열심당, 헤롯파, 사두개파, 바리새파) 당파들이 존재했으며 그들은 율법을 정치적, 종교적 유익에 따라 판단하고 해석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속사적 성취를 이루는 데 일조하게 된다. 특히 바리새파들은 유다가 멸망한 이유가 바로 율법에 대한 무지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불순종으로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교리화하고 체계화했지만 성경을 잘못 이해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했고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다. 

오늘의 본문은 엘고스 사람 나훔이 앗수르에게 주는 멸망의 메시지이다. 그의 예언은 니느웨 백성이 요나를 통해서 회개했지만 다시 옛 행위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진노한 메시지이다. 마태복음 12: 38-45에 보면 주님께서 니느웨 백성이 회개한 모습을 회개치 않는 바리새인들과 비교하신다. 요나서와 나훔서는 니느웨의 멸망과 회개를 촉구하는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요나서는 회개로 그 성이 심판에서 구원받았고 나훔서는 다시 타락한 그 성이 회개를 촉구하지만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두 책은 시간적으로 한 세대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성의 운명도 구원과 심판이 별개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우리에게도 요나의 시대와 나훔의 시대가 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고 회개를 통해서 구원의 기쁨을 누렸지만 나훔의 시대와 바리새인과 같이 형식적인 기도와 봉사, 열심으로 살 때도 있다. 하나님은 선하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지 않으면 심판 하신다. 만약에 우리가 죄를 지어도 심판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고아인 것이다. 심판은 두렵지만 심판을 보류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회개할 수 있다. 

나훔 1장에서 2-7절에 하나님의 다섯 가지 성품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은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다. 그 어떤 은혜와 열심으로 하나님을 따르던 사람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예수님께 죄를 회개하며 구원의 길을 가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한 모든 진노가 십자가 위로 쏟기 때문이다. 둘째는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다. 셋째는 하나님은 권능이 크신 분이다. 도저히 무너질 수 없던 견고한 니느웨성도 홍수로 인해서 쉽게 무너진다. 우리의 성공과 열심으로 쌓아온 견고한 것도 하나님 앞에서 티끌이다. 넷째는 하나님은 진노하실 때는 무섭게 진노하시는 분이다. 노아시대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처럼 하나님은 우상숭배와 죄악을 싫어한다. 우리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섬겨도 바리새인과 같이 외식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죄를 범할 수 있다. 다섯째는 하나님은 선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제 2의 요나와 같이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의인의 삶으로 살아갈 때 선하신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임하신다.  그럼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나훔서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죄가 나온다. 그것은 바로 교만의 죄이다. 이 교만은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전혀 생각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 교만의 결과는 패망의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신다. 바울과 스데반 집사 같이 바리새인으로 태어나 자라지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꺼지지 않은 은혜이다.

진리와 사랑을 입으라

에베소서 6:10-14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설교요약>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때 에베소에 교회를 세우고, 3차 선교 여행 때는 에베소의 두란노에서 2년 동안 제자들을 양육하면서 에베소 교회를 영적으로 활기찬 교회로 세우게 된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이 바로 에베소서인데, 그 서신은 성도들에게 영적 싸움에 대해 알려준다. 특히 1장에서 에베소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며 믿음으로 산 것에 대해, 바울은 늘 감사했지만 편지에 마지막 부분에서는 성령 충만한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더욱 더 그 분의 힘으로 강해져야 한다는 권면의 말씀을 하게 된다. 그럼 왜 주 안에서 더 강해져야 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11절에 나오는 마귀의 간계(길, 방법)이다. 따라서 성도가 믿음과 사랑이 있고 스스로 선 것 같더라도 더욱 더 주님 안에서 강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마귀는 계속해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공격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사시기 전에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세가지로 유혹한다. 바로 “돌을 떡으로 되게 하라” 그리고 “성전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하라”, “자신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 이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 유혹들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부 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마: 4:7)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이때 싸움에서 패배한 마귀는 떠나갔다. 그 영적 싸움 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마태복음 4장 24절에 보면 마귀(루시퍼)의 졸개들인 귀신들도 패배하게 된다. 즉 마귀의 유혹인 세상의 영광, 과시욕 그리고 정욕들을 물리치면 그의 졸개 귀신들도 힘을 잃는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면 두 가지 유익이 있는데 그 하나는 그 전쟁을 통해서 더욱 더 성령의 사람으로 강해지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원수 사단이 패배하면서 한 도시에 살고 있는 수 많은 영혼들이 어둠에서 풀려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의 중요한 이유이다. 

마귀는 아직도 이 시대의 사람들의 세계관을 통해서 당신이 눈으로 볼 때 위대한 일을 해야만 당신이 사랑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 무장하라고 명령한다. 그 첫 번째 무기는 진리의 허리띠다. 진리를 취하지 않으면 영이 힘을 쓰지 못한다. 진리의 반대말이 거짓말인데 이것을 분별해 내는 것이 바로 진리인 것이다. 야고보서 2장 2-4절과 디모데전서 2장 9-10절에 보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차별하지 말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내면이 외적으로 그 사람의 인격을 판단한다면 스스로를 먼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음성, 즉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도록 성령님을 곁에 있게 하셨다. 성령님이 없이는 누릴 수도 필요를 얻을 수도 없다. 그런 의미로 성령님은 상속의 담보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받기에 충분한 담보가 없다. 그러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담보로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성령님을 담보로 주셨다. 그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신다. 

두 번째 무기는 의의 호심경이다. 사단은 사랑의 능력을 잘 알기에 집중적으로 심장을 향해서 공격한다. 생명의 근원이고 사랑의 시작인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서 흉패로 보호해야 한다. 이 흉패는 바로 예수님의 심장이다. 조건 없이 계산 없이 무조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을 줄 때 조심하라고 한다. 누가복음 14장 12-14절에 보면 예수님은 다시 받기 위해서 조건적이고 계산적으로 상대방에게 베푸는 것의 위험성을 강조하신 것이다. 이런 초대와 대접은 마지막에 하나님으로부터 상이 없다. 그러나 다시 되돌림 받지 못했거나 혹시 다시 되돌림 받는 베풂을 주었어도 계산 없이 순수하게 했다면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 하신다. 따라서 계산하지 않고 준 것에도 보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이 땅에서 보상 받아도 천국에서 다시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계산적인 사랑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이렇게 할 때 의의 흉패를 우리의 심장에 붙이는 것이다.

우리는 소망이 없어 보이는 겨울나무처럼 도저히 살수 없을 것 같고 변화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곤 한다. 그러나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다시 부활시키고 바꾸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무리 소망 없고 불가능한 상황이라도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