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사람

에베소서 4:17-25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요동하지 않게

에베소서 4:13-16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4:7-12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에베소서 4:1-6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설교요약>
교회가 하나였던 시대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는 교회가 하나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중세시대에는 가톨릭 교회가 유럽국가들을 다스렸던 시기였지만 연옥을 면하고 천국에 갈수 있다는 면죄부를 돈으로 팔면서 사이비로 타락했던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때 무명의 사제였던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말씀에 의지해서 종교개혁이 시작된다.

 유아세례 문제
종교와 정치가 하나였던 시대에 쯔윙글리의 학생이었던 콘라드 그레벨이 유아세례의 문제를 제기한다. 초기 종교개혁자들도 인정하지 않은 재침례파가 나오게 된다. 그들은 유아세례의 문제만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며 교인들의 실질적인 경건한 삶을 강조하다. 하지만 그 당시 사회의 시스템의 시작이었던 유아세례를 부인함으로 가톨릭과 종교개혁파에게 동시에 학살을 당한다. 바울이 말하는 “세례가 하나”라는 말은 동일한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세례가 무엇인가?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행위로서 자기 스스로와 교회 앞에서 확인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그래서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에는 주님의 명령이기에 세례는 꼭 받아야 한다.

 세례를 주는 이름
마태복음 28:19절에 보면 이름이 단수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름은 하나이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대한 것이다.

 삼위일체 문제
성경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한 분이다 와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 성령님을 모두 하나님으로 기록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로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삼위일체 이해하기
하나님이 세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세 개의 위격이 있으시다. 구원의 역사에서는 아버지는 보내시는 분, 아들은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고 말씀을 가르치신 분, 성령은 그 힘을 주시며 함께 하신 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한 분에게 기도하고 한 분에게 찬양하고 한 분에게 예배한다. 하나님께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천국에 가면 누구를 만나는가?
성경에는 베드로와 바울이 분명히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한다. 마태복음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의 그 이름은 단수이며 하나의 이름이라고 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다 계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부피를 깨달아

에베소서 3:14-21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죄악의 역사
창조된 아담과 하와 후로 그 부모로부터 태어난 첫 사람이었던 가인이 동생을 돌로 쳐 죽였다. 그리고 10세대도 되지 않아서, 노아 때에 이르러서 인류는 마지막 선을 넘겨버린다. 더이상 인류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완전한 자멸로 갈 것이 분명한 상황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인류를 보전하기 위해서” 전지구적인 홍수를 통해서 노아와 가족만을 방주를 통해 구원하시고 나머지 모두를 멸망시키셨다.

사랑의 역사와 십계명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심판과 구원을 반복하셨다. 이스라엘에 주신 십계명의 목적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보호하기 위해 주신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힘을 다해서 하나님 사랑하고 모든 힘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 그런데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본질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그냥 문자 그대로만 지켜왔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그 율법 자체인 것처럼 대하면서 전혀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스라엘백성은 안신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가장 철저하게 지킨다. 하하님은 안실일을 안지키는것을 무엇보다 심각하게 생각하셨다. 그의 마음의 태도가 드러나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은 하나님은 안식일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셨고,그의 백성들도 그렇게 여기길 간절히 원했다는 사실이다.그렇다면, 왜 안식일이 그렇게 중요한가?

안식일이 중요한 이유
안식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동시에 실천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만나를 주신 하나님
하나님은 매일주신 만나를 여섯쨰 날은 이틀치를 거두게 하셨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신 이유는 바로 우리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는 말이다. 십계명을 주신 이유도 결국 우리를 위해서 라는 말이다.

변함이 없는 사랑
하나님이 인류를 다루시는 방식이나 느낌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달라져 왔지만 그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죄의 열매 : 실증하나님은 어떤 것에 ‘질리는’ 분이 아니다.‘질리는 것’ 이 바로 죄로 인해서 인간에게 생긴 특징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식어지거나, 질리지 않으시고, 항상 한결같다.

신실하신 하나님
노아의 시대에 더이상 두고보지 못하게 만든 타락의 정도를 드러낸 시대에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으심으로 오래참으시고, 또 만나를 40년간 똑같이 내려주신 하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변치않는 그분의 신실함을 보게된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계속 약속들을 계속 깨트리고 실망스러운 이런 아들, 딸들을 보시면서도..맨 처음 우리를 바라 본 그 눈으로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바라보신다. 처음 우리를 보시고 감격 하셨던, 그 마음 그대로 우리를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 사랑을 우리가 온전히 ‘경험적으로’ 알 때 우리도 그 신실한 사랑 할 수 있다.

하나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바울은 그냥 간단 명료하게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우리가 알길 원한다. 월요일 화요일..그리고 주일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찾아오는 것처럼그분의 사랑도 신실하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신실한 사랑 할 수 있다. 지금 이곳에 흐르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를 그분처럼 신실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우리가 더 견고하게 하나되는 교회가 되고, 성전이 되어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그 신실하신 주님의 실제적인 임재 앞에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더 채워지면 채워질 수록우리도 조금씩 더 신실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그토록 강조하셨다. 안식일이 매주 변함없이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모인 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하루를 천년처럼 쓰실 수 있기에오늘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하면 할 수록 우리는 서로를 더 신실하게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예배하는 분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