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영광스럽게

에베소서 3:8-13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 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 이니라

<설교요약>
교회로 통일되는 하늘과 땅
영원부터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그 비밀의 경륜은 바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즉, 교회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이제 놀랍지 않은 일일 수도 있지만 천사들에게는 놀라워할 일이다. 그 이유는 , 결국 그리스도와 교회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들 뿐 아니라, 그들이 하나 되어서 하늘의 천사들과 또 하나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엡1:10)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 되는 것만으로도 충격방을 일인데, 천사들도 우리와 연합하게 되는 일이 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본문 10절에 각종 지혜란, 그런 일이 어떻게, 언제 일어나는지에 관해서는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있기 때문에 교회가 그 비밀을 밝히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이런 역할들을 담당하는 것들은 ‘영우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장 분명한 영원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사람과 하나님이 화목하여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를 통해서 모든 인류가 인종, 문화, 언어를 넘어서서 하나되고, 천상의 존재들과도 하나 되는 것이 바로 영우너 전부터 예정되어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늘의 권능들, 천사들도 교회를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은 자신이 받은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환난을 받는 것이 ‘너희의 영광’이다ㅣㅣ 라고 말하고 있있다(13절). 바울은 왜 자신이 받은 환란을 ‘나의 십자가’, ‘나의 면류관’ 혹은 ‘나의 영광’이니 낙힘말라라고 하지 않고 ‘너희’ 즉, 에베소 성도들의 영광이라고 했을까?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에 유력한 가문의 출신, 마음만 먹으면 편한한 삶을 살 수도 있는 조건이었다. 예수를 믿게된 후에도 학벌, 집안, 신분등을 유지하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면서 편안하게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베소 교인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그렇게 생업까지 포기하며 회심했는데 정작 바울이 적당히 터협하는 삶을 살아 갔다면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은 그의 삶은 결코 그들에게 영광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삶이 영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에베소에서 전했던 복음이 공허한 말 분이 아니라 그가 믿음을 지키는 삶을 살아내고 있었었기 때문이었었다. 그것이 결국 여러 환난과 감옥에 갖히는 것까지 의미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걸 만한 가치있는 것임을 바울은 그의 삶으로 증명한 것이다.

진실된 겸손
인간은 영원우러러 향한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겸손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면 갈 수록 부끄러운 나의 죄가 더 헌명하게 드라나고 더욱 극심한 거북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 중에 있는 이 성자와 같은 바울은 자신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이라는 낮출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있다. 빛으로 나아가면 갈 수록 죄와 악은 더욱 분명하게 드라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빛은 정죄의 빛이 아니다. 그 빛은 따스하고 상처주지 않고, 수치심과 아픔들을 치유하는 빛이다. 그래서 12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담대함과 확신을 주는 그 빛으로 더욱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겸손해진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거북함과 혐오감으로, 새롭게 되기 위한 내적 갈등을 겪지만,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점점 더용납하고 용서하는 넓은은 가가슴의 사람이 되어간다. 그렇게 예수님을 점점 더 닮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험악한 상화황 소속에서도 찬송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영원의 소망을 나타낼 수 있있다는 것이 영광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모든 고난은 겪는 사람에겐 비할 수 없이 힘든 일이다. 그러나 생명을 건 고난의 끝에 숨을 거둔 바울이나 예수님의 생애와 비교하면 우리가 겪는 고난은 대부분 ‘불편함을 감수’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위해 작은 불편들을 감수할 수 있다면 우리도 교회를 위해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 영원한 주님의 교회에 영광이 된다면 우리는 자연히 내 가족들에게도 역사속에서 영원까지 이어지는 영광스러운 존재로 빛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나는 교회의 작은 영광이 되었는가?

선물 중의 선물

에베소서 3:1-7
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설교요약>
아름다운 지위 : 집사 
집사에 대해서 이렇게 상세하게 적고 있다면, 그보다 상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장로나 감독, 사도 등에 대해서도 적어야 할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 집사라는 것은 사실상 교회를 섬기는 모든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다. 지위 : 원어로 보면 직분을 잘 한자 라는 의미가 사실은 '섬기기를 잘 한 자' 들은.. 이라고 되어있다. 그들에게 주어 지는 것은 아름다운 지위!인데 아름답다는 말은 그냥 좋은 것을 넘어선 ‘뛰어난', '빼어난' 이라는 의미를 가 지고 있다. 'Better' 처럼 비교하면서 '더 아름다운' 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다.겸손히 종처럼 서빙을 했는데 영광스러운, 빼어난 지위를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이런 사람들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마태복음 20:27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가면, 모두들 깜짝 놀랄만한 반전들을 아주 많이 목격하게 될 것이다. 으뜸인 줄 알았던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그곳에서는 작은 자들이며 정말로 이름도 없이 묵묵히 낮은 자리에서 섬긴 분들이 가장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있는 것을.. 교회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닮아갈수록, 이곳에서 만큼은 똑같은 가치가 적용될 것이다. 


선물 중의 선물
에베소서 3:7을 보면 '은혜의 선물'을 이라고 했는데 은혜라는 단어, 선물이라는 단어 둘다 '선물'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동의어들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이렇게만 말해도 이미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는데 그는 그것을 두번이나 사용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선물 중에 선물이다! 라고 강조한 것이다. 은혜로 주신 것이 많지만 그중에 최 고의 선물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이의 '집사','종' 디아코노스가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노년의 바울은 현재 감옥에 사슬에 묶인 상태이며, 뿐만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환난을 당해왔다. 그리고 그런 인생이 된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다. 그가 그냥 정통 유대인으로 살았다면 겪지 않았어야 할 이 모든 고난이 시작된 계기가 뭐였나? 바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 중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울은 정말 모든 조건이 뛰어난 촉망받는 청년이었다. 아쉬울 것이 없고, 부족함이 없이 장래가 촉망되는 사울이 또하나의 자신의 정치적 업적을 향해 다매섹으로 향해가던 길에 주님께서 사울을 부르셨고 그분의 계획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이 사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도행전 9:15 그리고 그 부르심에 순종한 사울은 위에 나열했던 모든 특권들..지위들을 순식간에 모두 잃게 된다. 과연 그것을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종이 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현상 수배자가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어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며 주님을 위해 살았던 바울의 말년은 편안했을까? 그가 예수를 30대 때에 따르기 시작했고 60여세에 순교하게 되었는데 그의 마지막 10년은 거의 감옥에서 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이 이 에베소서를 작성한 시점도 그가 순교하기 얼마 전 그러니까 노년에 감옥에서 쓴 편지인데.. 여기에서 그는 예수와 함께한 자신의 인생의 시간들이 선물이었다고 고백한다! 여러분이라면 그것을 주님의 선물이라며 감사하겠는가? 


선물의 가치
지난 주에 우리 아이들에게 생일 카드를 받았다. 이게 뭐라고 쓴 거 같은가? 아직 글을 쓸 줄 모르니까 이렇게 그림으로만 표현을 했고 추상화에 소질이 있어서 해석이 좀 난해하다. 그러다 이 아이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마음을 보려고 했더니 금새 알 수 있었다. 'Daddy I love you' 나 그 비슷한 뜻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어떤 대단한 명화나 명필이 이보다 더 내 가슴을 춤추게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내 사랑하는 아이의 소박하지만 마음이 담긴 선물이기 때문에 어떤 것 보다도 아름답고 값진 것이다. 이처럼 선물의 진정한 가치는 그 선물의 가격이 아니라 누가 어떤 마음으로 그 선물을 내게 주었는가? 로 결정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을 때
바울은 그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그 부르심, 일꾼으로 부르신 그것을 선물 중의 선물이라며 가슴이 춤을 추는 감격을 누리게 된 것이다.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평생 엄하고 딱딱하고 두렵기만한 하나님을 상상하며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사형을 집행하는 일에도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다. 그런데 자신과 비해도 보잘 것이 하나 없는 나사렛이라는 소박한 동네에 미천한 노동자. 목수로 오신 하나님 예수, 세리나 창기와 같이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죄인들과 친구가 되어주셨고 모두가 더럽게 여기며 가까이 가지도 않았던 사마리아 여인이나, 이방인 나병환자에게까지 손을 내밀어 주 었던 예수,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더욱이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잡아 들이고 해치고 다녔던 바울 자신과 같은 사람을 위해서 그 잔인하고 비참한 십자가 지셨던 분, 하나님이시기에 쉽게 물리쳐 버릴 수 있었던 그 십자가에 벌거벗긴 채 달리셔서 초라하게 죽어갔던 그 예수가 만유의 왕 하나님, 엄격한 율법주의자로 살았던 바울이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이 사실은 마치 어린 아이를 바라보는 미소 띈 아빠와 같은 '사랑의 하나님'임을 눈 앞에 거울을 보듯 선명하게 알게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심장이 그 안에서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바울에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했던 말씀을 그대로 다시 하셨다. 사도행전 13:47 그것은 예수님이 모든 제자들에게 지상의 마지막 명령으로 하신 말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그 말씀과 똑같은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함께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하신 아들에게 맡겼던 일, 아들이 하나님의 종들, 집사들에게 우리에게 맡아달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부르심이다! 그것을 위해서 바울과 제자들은 때로는 선교를 떠났고, 옥에 갖혔으며, 마을마다 전도를 다니기도 했다. 또 때로는 텐트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교회의 재정을 도왔다. 임금들 앞에서 복음을 증거 하기도 했고, 세상의 철학자들과 더불어 논리적으로 변증하기도 했다. 그 모든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그와 함께 했던 교회에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일꾼으로 함께 섬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유한한 인생을 사는 인간에게 그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리기 위해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다는 사실, 그것보다 영광스러운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이 선물 중의 선물이다! 라고 감격한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떤 선물들을 받았는가? 하나님께 선물을 받은 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디아코노스, 주님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 앞에 드러 나는 일이든, 이름없이 하는 일이든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선물 중의 선물이다! 여러분은 그 아름다운 지위를 기쁨으로 받을 것인가? 여러분은 이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그분의 종, 디아코노스가 되시겠습니까?

성전이 되어 가고

에베소서 2:20-22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설교요약>
교회와 건물
오늘 본문은 교회를 건물로 비유하고 있다. 건물은 작은 방, 큰 방, 또 기둥과 벽, 창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와 같이 건물을 빌려서 쓰는 교회 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 건물이 교회였던 적은 없었다.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식화 하기 전까지 교회는 대부분 가정 집에서 만났고, 우리가 보고 있는 에베소의 교인들은 우리처럼 두란노라고 하는 학교건물에서 모였다. 그런데 교회가 건물들을 짓고 소유하게 되면서 발생되는 가장 큰 문제는 그 건물에 가 서 앉아 있다가 오면 예배를 드렸다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건물이 아무리 천국의 성전을 닮았고 커다랗고 아름다운 십자가가 걸려 있어도 서로 이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가 그곳에 없다면, 그곳은 세상 어느 곳보다 공허한 곳이 될 뿐이며 서로 사랑하기는 커녕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옆에 앉아 있는 사람도, 얼굴이나 이름 정도 밖에 모 른다면 그 곳은 결코 교회 일 수 없고, 온전한 예배일 수도 없는 것이다.

개인의 구원
1950년대는 미국 근대의 기독교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었던 시대였다. 놀라운 것은 왕성하게 집회와 캠퍼스 전도를 하던 그 50년대는 미국인의 95%가 기독교인 이었고, 대부분 교회에 멤버쉽을 가지고 있었던 때였다는 것이다. 도대체 집회를 할 때마다 나타나는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들이 다니던 교회가 단지 십자가가 매달린 건물로 전락해 버렸을 때에 마치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이 의무감에 일주일에 한차례 회당에 출석하는 것과 같이 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주일의 일상이 되어버렸을 때에 그 종교적 건물은 더이상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연히 생명이 없는 그곳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구원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에 주님께서 그러한 파라처치들을 통해서 교회를 새롭게 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런 무브먼트의 가장 큰 수혜자 중의 하나가 한국 기독교였다.

개인 구원의 함정
그러나 그 엄청난 전도와 구원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도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급속도로 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면죄부를 쥔 사람처럼 더 자유롭게 교회를 떠나고도 떳떳해지게 해준 것이다. 사영리에도 영접 후에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하고, 믿음의 공동체를 만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거짓의 아비는 사람들의 눈의 가리워 교회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1950년대에는 단지 교회의 건물을 습관처럼 드나드는, 종교인들 nominal 크리스쳔들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교회 자체를 거부하면서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또 다른 문제를 직면하고 있다.

싹트지 못하게 된 씨앗 & 진정한 교회의 진정한 제사
최근 한국의 ‘기독교 신문’(교회와 신앙)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지만 교회에는 전혀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의 숫자가 전체 기독교인의 23%로 최근 5년간 두배로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여전히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75%에 이르는 미국은 더 심각하다. 다른 조사에서 최 소한 적을 두고 교회에 출석하는 인구가 40% 조금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기 때문에 그 두가지 결과를 종 합해 보면, 결국 미국 크리스쳔의 절반 가까이가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사결과 대다수의 교회를 나가지 않는 교인들은 인터넷 등으로 예배를 본다고 대답했다.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는 것 자체를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유튜브로 다른 것들 보는 것 보다는 훨씬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로 설교를 듣는 사람이 거기에서 울려퍼지는 모든 말씀을 아멘으로 다 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그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보여지고 나타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일주일에 몇개의 설교를 독파한다고 해도 그것은 공부는 좀 될지 몰라도, 결코 예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를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만나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예수를 만난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해야 한다. 성전은 한사람 한사람을 뜻하는 것도 어느정도 상징적인 역할이 되지만 바울이 그 말을 할 때는 분명히 너희 - 교회를 뜻했다. 우리가 서로 이어져서 성전이 되어가고, 주님의 처소가 되어간다고 말한다. 교회가 성전이 되어진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다! 성전은 항상 성령이 충만하고, 그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항상 가득한 곳이었다. 죄가 있는 자들은 찔림과 고민으로 회개하게 되며, 고난 가운에 있는 자들은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는 능력이 온전히 거하는 곳이 성전이다. 평가와 정죄는 사라지고 용납과 용서.. 그 사랑이 넘쳐나는 곳이 된다. 하나님이 곧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언제나 성령으로 주님의 임재로 충만하다. 그것이 교회의 영광이며, 교회의 능력이다.

무리의 경건이 개인의 경건으로
개인들이 경건할 때 무리가 경건해진다라는 것이 세상의 생각이지만 성경적으로는 오히려 반대로 무리가 견고하게 연결되어질 때, 성전이 되어 하나님의 임재가 그곳에 충만할 때, 거기에 속한 개인들이 충만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모이기를 힘써서 모일 때에 이뤄지는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성전을 누려야 한다. 그때 우리의 일상에서도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 여러분은 우리와 함께 성전을 지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이 건물의 한쪽에 앉아는 있지만 교회에 속하지는 못하고 있는가?

보이는, 보이지 않는 전쟁

여호수아 1:1-6
1 여호와의종모세가죽은후에여호와께서모세의수종자눈의아들여호수아에게말씀하여이르시되
2 내종모세가죽었으니이제너는이모든백성과더불어일어나이요단을건너내가그들곧이스라엘 자손에게주는그땅으로가라
3 내가모세에게말한바와같이너희발바닥으로밟는곳은모두내가너희에게주었노니
4 곧광야와이레바논에서부터큰강곧유브라데강까지헷족속의온땅과또해지는쪽대해까지너 희의 영토가 되리라
5 네평생에너를능히대적할자가없으리니내가모세와함께있었던것같이너와함께있을것임 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 강하고담대하라너는내가그들의조상에게맹세하여그들에게주리라한땅을이백성에게차지 하게 하리라

<설교요약>
음식의 재료나 장식도 중요하지만 입맛이 없으면 모든 것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눈에 띄게 보이는 영역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역이 실제로는 더 중요합니다.  즉 음식에는 입맛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근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신명기 3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더 자주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 하라고 하십니다. 여호수아는12명의 정탐꾼 중에 가장 용감한 사람이며 40년동안 모세와 함께한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여호수아에게 계속해서 강하고 담대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가나안 땅의 정복은 보이는 육적인 전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전쟁 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7:10-13에 보면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이스라엘이 용감해서가 아니라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겼기 때문입니다. 선교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와 같이 믿음이 강하고 담대할 때 아름다운 사역을 완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후에 3가지 단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방법들을 보여주십니다.

 첫째는 법궤가 먼저 요단강을 건넌 것입니다.  여호수아 3장 3, 5절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지키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적군을 이기기 위해서 특공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궤를 먼저 건너게 하는 무모한 작전을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하는 겁니다. 이 순종에는 반드시 믿음의 강함과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적들이 있는 길갈에서 이스라엘 남자에게 할례를 요구한 것입니다. 할례를 받으면 대항할 수도 없고 적이공격하면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전투의 승리를 위한 군사적 준비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를 확실히 지니는데순종합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앞에 적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그의 믿음을 보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먼저 크리스천으로서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셋째는 여리고 성의 점령입니다. 하나님은 상식에 맞지 않는 명령으로 여호수아에게 여리고를 점령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지만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과 이 땅을 주실 것을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그 결과로 적과의 싸움 없이 완벽한 승리를합니다. 실상은 그들이 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하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강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믿음으로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의 순종은 강하고 담대한 믿음 없이는 순종하기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 하라”

마지막 소원

요한복음 17:1-11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