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이 되어 가고

에베소서 2:20-22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설교요약>
교회와 건물
오늘 본문은 교회를 건물로 비유하고 있다. 건물은 작은 방, 큰 방, 또 기둥과 벽, 창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와 같이 건물을 빌려서 쓰는 교회 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 건물이 교회였던 적은 없었다.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식화 하기 전까지 교회는 대부분 가정 집에서 만났고, 우리가 보고 있는 에베소의 교인들은 우리처럼 두란노라고 하는 학교건물에서 모였다. 그런데 교회가 건물들을 짓고 소유하게 되면서 발생되는 가장 큰 문제는 그 건물에 가 서 앉아 있다가 오면 예배를 드렸다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건물이 아무리 천국의 성전을 닮았고 커다랗고 아름다운 십자가가 걸려 있어도 서로 이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가 그곳에 없다면, 그곳은 세상 어느 곳보다 공허한 곳이 될 뿐이며 서로 사랑하기는 커녕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옆에 앉아 있는 사람도, 얼굴이나 이름 정도 밖에 모 른다면 그 곳은 결코 교회 일 수 없고, 온전한 예배일 수도 없는 것이다.

개인의 구원
1950년대는 미국 근대의 기독교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었던 시대였다. 놀라운 것은 왕성하게 집회와 캠퍼스 전도를 하던 그 50년대는 미국인의 95%가 기독교인 이었고, 대부분 교회에 멤버쉽을 가지고 있었던 때였다는 것이다. 도대체 집회를 할 때마다 나타나는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들이 다니던 교회가 단지 십자가가 매달린 건물로 전락해 버렸을 때에 마치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이 의무감에 일주일에 한차례 회당에 출석하는 것과 같이 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주일의 일상이 되어버렸을 때에 그 종교적 건물은 더이상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연히 생명이 없는 그곳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구원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에 주님께서 그러한 파라처치들을 통해서 교회를 새롭게 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런 무브먼트의 가장 큰 수혜자 중의 하나가 한국 기독교였다.

개인 구원의 함정
그러나 그 엄청난 전도와 구원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도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급속도로 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면죄부를 쥔 사람처럼 더 자유롭게 교회를 떠나고도 떳떳해지게 해준 것이다. 사영리에도 영접 후에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하고, 믿음의 공동체를 만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거짓의 아비는 사람들의 눈의 가리워 교회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1950년대에는 단지 교회의 건물을 습관처럼 드나드는, 종교인들 nominal 크리스쳔들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교회 자체를 거부하면서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또 다른 문제를 직면하고 있다.

싹트지 못하게 된 씨앗 & 진정한 교회의 진정한 제사
최근 한국의 ‘기독교 신문’(교회와 신앙)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지만 교회에는 전혀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의 숫자가 전체 기독교인의 23%로 최근 5년간 두배로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여전히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75%에 이르는 미국은 더 심각하다. 다른 조사에서 최 소한 적을 두고 교회에 출석하는 인구가 40% 조금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기 때문에 그 두가지 결과를 종 합해 보면, 결국 미국 크리스쳔의 절반 가까이가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사결과 대다수의 교회를 나가지 않는 교인들은 인터넷 등으로 예배를 본다고 대답했다.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는 것 자체를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유튜브로 다른 것들 보는 것 보다는 훨씬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로 설교를 듣는 사람이 거기에서 울려퍼지는 모든 말씀을 아멘으로 다 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그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보여지고 나타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일주일에 몇개의 설교를 독파한다고 해도 그것은 공부는 좀 될지 몰라도, 결코 예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를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만나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예수를 만난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해야 한다. 성전은 한사람 한사람을 뜻하는 것도 어느정도 상징적인 역할이 되지만 바울이 그 말을 할 때는 분명히 너희 - 교회를 뜻했다. 우리가 서로 이어져서 성전이 되어가고, 주님의 처소가 되어간다고 말한다. 교회가 성전이 되어진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다! 성전은 항상 성령이 충만하고, 그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항상 가득한 곳이었다. 죄가 있는 자들은 찔림과 고민으로 회개하게 되며, 고난 가운에 있는 자들은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는 능력이 온전히 거하는 곳이 성전이다. 평가와 정죄는 사라지고 용납과 용서.. 그 사랑이 넘쳐나는 곳이 된다. 하나님이 곧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언제나 성령으로 주님의 임재로 충만하다. 그것이 교회의 영광이며, 교회의 능력이다.

무리의 경건이 개인의 경건으로
개인들이 경건할 때 무리가 경건해진다라는 것이 세상의 생각이지만 성경적으로는 오히려 반대로 무리가 견고하게 연결되어질 때, 성전이 되어 하나님의 임재가 그곳에 충만할 때, 거기에 속한 개인들이 충만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모이기를 힘써서 모일 때에 이뤄지는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성전을 누려야 한다. 그때 우리의 일상에서도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 여러분은 우리와 함께 성전을 지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이 건물의 한쪽에 앉아는 있지만 교회에 속하지는 못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