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영광스럽게
/에베소서 3:8-13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 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 이니라
<설교요약>
교회로 통일되는 하늘과 땅
영원부터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그 비밀의 경륜은 바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즉, 교회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이제 놀랍지 않은 일일 수도 있지만 천사들에게는 놀라워할 일이다. 그 이유는 , 결국 그리스도와 교회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들 뿐 아니라, 그들이 하나 되어서 하늘의 천사들과 또 하나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엡1:10)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 되는 것만으로도 충격방을 일인데, 천사들도 우리와 연합하게 되는 일이 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본문 10절에 각종 지혜란, 그런 일이 어떻게, 언제 일어나는지에 관해서는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있기 때문에 교회가 그 비밀을 밝히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이런 역할들을 담당하는 것들은 ‘영우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장 분명한 영원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사람과 하나님이 화목하여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를 통해서 모든 인류가 인종, 문화, 언어를 넘어서서 하나되고, 천상의 존재들과도 하나 되는 것이 바로 영우너 전부터 예정되어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늘의 권능들, 천사들도 교회를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은 자신이 받은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환난을 받는 것이 ‘너희의 영광’이다ㅣㅣ 라고 말하고 있있다(13절). 바울은 왜 자신이 받은 환란을 ‘나의 십자가’, ‘나의 면류관’ 혹은 ‘나의 영광’이니 낙힘말라라고 하지 않고 ‘너희’ 즉, 에베소 성도들의 영광이라고 했을까?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에 유력한 가문의 출신, 마음만 먹으면 편한한 삶을 살 수도 있는 조건이었다. 예수를 믿게된 후에도 학벌, 집안, 신분등을 유지하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면서 편안하게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베소 교인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그렇게 생업까지 포기하며 회심했는데 정작 바울이 적당히 터협하는 삶을 살아 갔다면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은 그의 삶은 결코 그들에게 영광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삶이 영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에베소에서 전했던 복음이 공허한 말 분이 아니라 그가 믿음을 지키는 삶을 살아내고 있었었기 때문이었었다. 그것이 결국 여러 환난과 감옥에 갖히는 것까지 의미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걸 만한 가치있는 것임을 바울은 그의 삶으로 증명한 것이다.
진실된 겸손
인간은 영원우러러 향한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겸손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면 갈 수록 부끄러운 나의 죄가 더 헌명하게 드라나고 더욱 극심한 거북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 중에 있는 이 성자와 같은 바울은 자신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이라는 낮출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있다. 빛으로 나아가면 갈 수록 죄와 악은 더욱 분명하게 드라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빛은 정죄의 빛이 아니다. 그 빛은 따스하고 상처주지 않고, 수치심과 아픔들을 치유하는 빛이다. 그래서 12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담대함과 확신을 주는 그 빛으로 더욱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겸손해진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거북함과 혐오감으로, 새롭게 되기 위한 내적 갈등을 겪지만,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점점 더용납하고 용서하는 넓은은 가가슴의 사람이 되어간다. 그렇게 예수님을 점점 더 닮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험악한 상화황 소속에서도 찬송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영원의 소망을 나타낼 수 있있다는 것이 영광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모든 고난은 겪는 사람에겐 비할 수 없이 힘든 일이다. 그러나 생명을 건 고난의 끝에 숨을 거둔 바울이나 예수님의 생애와 비교하면 우리가 겪는 고난은 대부분 ‘불편함을 감수’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위해 작은 불편들을 감수할 수 있다면 우리도 교회를 위해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 영원한 주님의 교회에 영광이 된다면 우리는 자연히 내 가족들에게도 역사속에서 영원까지 이어지는 영광스러운 존재로 빛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나는 교회의 작은 영광이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