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에 붙들린 사람
/사도행전 14:19-28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설교요약>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가장 중요하게 다룬 주제는 성령님의 성품과 특성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내 안에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지 궁금해 한다. 금주 말씀에는 내면에 성령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 내면이 요동치지 않는다
한 영혼의 내면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이 함께 하시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 때 두드러지는 성품의 변화는 어떤 상황 속에도 쉽게 요동치 않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잠 4:23) 울었다가 바로 웃고, 화냈다가 바로 온화해지고, 사랑했다가 바로 미워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다 바로 세상 정욕에 사로잡히고, 칭찬했다가 바로 비난하고, 자신을 너무 좋아했다가 바로 자신을 혐오하며, 기뻐했다가 바로 슬퍼하는 삶이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삶인 것이다. 이런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삶의 결과는 '생명의 근원'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기쁨과 평안이 없으니 슬픔과 허무와 공허가 그 내면을 채운다. 그러나 마음을 지켜주는, 진리이신 예수와 성령, 그리고 말씀이 내면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요동치는 삶에서 흔들림 없는 삶으로 변화하므로 스스로에 대한 후회보다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증가한다. 이러한 삶의 근원적 문제는 그 내면의 마음을 지켜줄 진리가 있는가 없는가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돈도, 명예도, 인기도, 사람도, 결코 우리 삶의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가치들은 우리의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우리를 지켜줄 수 없다. 바위처럼 내면이 견고해지고 있다면 진리되신 성령이 당신의 내면에 살아 계시다는 증거다.
2) 하나님이 주신 양을 삶의 우선 순위에 둔다
무조건 어려운 사역을 하려는 것이 영적이고 성스러운 일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 속에 자신의 야망과 탐욕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음도 깨달아야 한다. 반면 영혼을 향한 사랑 때문에 어려운 일과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의 우선 순위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이 선택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았을까? 바울이 자신을 죽인다 한 의미는 세상의 정욕과 죄와 쾌락을 마음 속에 품게 될 때마다 그 마음들을 죽였다는 걸 의미한다. 자신을 죽인다고 한 고백 속에는 자신도 그런 죄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우리는 가장 어려운 일을 하고,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하고, 자신을 희생할 때에도 죽어지지 않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자아가 있을 수 있다. 그 때마다 그런 자아와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죽여야 한다. 그럼 어떻게 죽여야 할까?
3) 죄성의 태도와 행동들을 죽이기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구한다
우리 스스로는 자신이 가장 많이 희생하고 헌신하고 있고 또한 가장 영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곤 한다. 하나님은 이런 자아를 못박으라 하신다. 성령에 의해 인도되지 못한 자아는 혼자라는 외로움과 무거운 짐으로 인해 그 영혼이 상한다. 그리고 근심과 걱정이 너무 커져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의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심을 믿을 때 우리의 근심은 찬송으로, 걱정은 기도로 바뀐다. 바울은 자신을 정욕과 교만과 차별과 무시로 이끄는 몸의 근성이 있었다. 반면 성스러운 삶을 추구하고, 겸손하며, 희생하는 모습을 추구하려는 은혜도 그 안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정적인 것이 마음에서 제어되지 않아 밖으로 표출되려 할 때, 그런 흉한 죄성의 태도와 행동들을 노예 다루듯 다루었다. 그 때 그가 노예처럼 다룬 몸의 태도와 행동이 다시 마음에 영향을 주어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보기에 아름다운 태도와 행동이 그로부터 흘러나오게 하는 경험을 하였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분의 도움을 구할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우리의 몸이 우리 자신에게 복종하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의 생각과 몸의 행동을 노예 삼고 있는가? 그럴 때마다 뜻하지 않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가? 삶의 우선 순위가 무조건 어려운 일, 어려운 곳으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 안에 있는 양들을 사랑함인가? 당신의 내면에 요동치는 파도가 점점 바위처럼 견고해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께 붙들린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