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1부> | 은혜 받는 감람나무<2부>
/<1부 - 배현석 전도사님>
마가복음 5:1-20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2부- 양정상 목사님>
나훔 1:9-15
9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0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13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14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설교 요약>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었다. 나훔은 남 유다 요시야 왕 때 선지자였다. 요시아는 8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우상을 버리고 성경을 정리하는 종교 개혁을 통해 남 유다 를 하나님이 기뻐하는 나라로 회복 시켰다.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남 유다도 두 번이나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이 당시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였으며, 남 유다의 히스가야는 하나님이 기뻐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히스가야가 우상과 산당을 없애는 것을 보고 앗수르 왕은 히스가야가 마치 자기 신을 부순다고 여기며 비웃었다. 그러나 3천년 동안 강국이던 앗수르는 작은 남 유다를 결코 함락하지 못했다.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인들이 서로를 해치도록 교란시키시어 185,000명이나 죽이셨기 때문이였다. 나훔서 3:17의 기록처럼 앗수르는 1845년 발굴 전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던 나라였다. 또한 나훔의 예언대로 그 시대 최강국이던 앗수르에 대한 심판이 성취되었으며, 이 일은 억압받던 남 유다에게는 구원이 되었다. 곧 앗수르의 멸망은 남 유다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되었다.
바울 또한 로마서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죄와 사단으로부터 건지고 사망에서 해방시키심을 아름다운 소식이라 일컬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단을 심판하시며 우리를 구원함에 있다. 하나님의 성품엔 공의와 사랑(은혜)이 공존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 받았기에 그 분의 공의를 실감하지 못한다.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지불한 대가에도 공감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은혜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 분의 이끄심을 바라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오늘도 십자가에 못밖힌 손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기뻐하시기 위해 노크하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선과 의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갈 수 없는 이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 오셨다. 세상 사람들은 구원을 원치 않으나 죄인이기에 구원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참 감람나무에 접붙인 돌 감람나무의 비유를 통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즉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이 구원 받은 일을 가지고 구원 받은 유대인들과 은혜를 저버린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우선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교만해선 안된다고 경고했다. 교만한 불신 유대인도 벌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이방인 그리스도의 교만은 더욱 가차 없이 벌하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였다. 여기서 심판 받은 앗수르가 누구인지 되짚어 보자. 앗수르는 노아의 아들 함의 자손인 니므롯의 후예들이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괴롭혔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앗수르의 조상 함은 노아와 함께 방주 속에 있었다. 앗수르가 만약 나의 가족이라면 앗수르의 심판이 당연하게 느껴질까? 아니다 그들이 우리의 가족이라면 우리의 기도는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바울이 참 감람나무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인 비유를 들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팔레스타인 농사법에 관한 옛 문서를 보면 이렇게 접붙임을 하는 이유는 돌 감람나무에서 열매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열매 못매는 참 감람나무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이면 생기 잃은 참 감람나무가 다시 살아난다고 한다. 즉, 이방인을 하나님 백성으로 살릴 뿐 아니라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도 함께 살리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말한 것이다. 탕자의 이야기에서도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를 용서하고 사랑했다. 그 모습에 불평하는 탕자 형도 본인이 늘 성실하다는 교만을 버리고 탕자와 행복하게 살기를 아버지는 바랬을 것이다. 우리도 원래 탕자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탕자 형이 된 사람이다. 우리가 행하고 섬긴 것에 대해 탕자에게 자랑하고 교만할 것도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참 감람 나무 같은가? 돌 감람 나무인가? 답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참 감람나무가 되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선택받을 수 밖에 없는 특별함이 이스라엘 백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뿌리 내리고 있었기에 참 감람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도 앗수르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옮기시어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 감람나무가 된 것도 은혜이다. 바울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주의해야 할 두 가지도 살펴보자. 첫째, 특권의식이다. 둘째, 은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영혼들로 인해 주시는 은혜를 찾자. 그 영혼들이 열매 없는 우리를 깨울 것이며 우리가 있었던 구원의 은혜를 회복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