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보려면

사도행전 17:15-34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나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고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들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붇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나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여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슴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고 있었더라 
 

<설교요약>
사도바울은 2차 전도여행때 베레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해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도록 방해를 받았다. 바울은 핍박하는 무리들에게 쫒기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아테네에 머물면서 베레아에 남아있던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바울이 전했던 말씀중에 두개의 구절을 함께 묵상해 보려고 한다.

정해주신 시간과 경계
26절에 보면 두 개의 단어가 눈에 띈다. '연대와 경계' 다. 연대는 “정한 때” 라는 어떤 시기와 기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계는 “정해진 한계”라는 장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시간과 장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시간과 장 소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라
27절을 보면 성령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신다. 특히 '더듬어' 라는 단어는 “만져보다” 라는 의미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주의 깊게 묵상해 봐야 한다.

하나님을 찾는 방법
1) 축복하는 사역이다.
야곱의 생애를 한가지로 압축하면 “축복하는 일”이었다. 창세기 47장 9절에서 10절을 보면 애굽의 왕인 바로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했다. 그 다음에 야곱의 죽음이 가까워 올 때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하는데 이때 장자인 므낫세에게 야곱이 오른손을 얹지 않고 둘째인 에브라임에게 얹은 것을 보고 잘못 얹은 줄 알고 요셉은 아버지의 손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야곱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창: 48:19) 하며 그 손을 옮기지 않고 에브라임을 므낫세 보다 앞세웠다. 이것은 야곱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영에 붙잡혀 축복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12명의 아들들을 축복하며 생애를 마쳤다. 그리고 훗날 그 예언들이 모두 성취되었음을 그 증거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또한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 한 축복임을 증명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선택하시고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겠다고 감동시키신 일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야곱이 가졌던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다.당신이 누군가를 축복할 때 당신은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2)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
시편 143장 7절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그분의 얼굴을 숨기실 때 자신의 영혼이 피곤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얼굴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그분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취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증거는 기쁨과 평안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주먹으로 치고 침을 뱉었다. 이제 하나님은 이렇게 수치와 폭력으로 인해 일그러진 이 땅의 영혼들의 얼굴을 그분의 손으로 감싸주고 상처를 싸매주며 흐르는 눈물과 피를 닦아주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가로막는 고질적인 방해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또 다른 수치와 폭력에 상한 마음이다. 우리는 마음이 완벽하게 죄 사함 받고 치유 되기 전 까지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삶 속에서 겪는 슬프고 마음상하는 일들이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의 고통 받는 마음에 치유와 기쁨을 줄 수 있는 능력임을 말씀하고 있다.하나님이 당신의 그 해결되지 않은 슬픔과 고통들로 누군가를 치유하고 있을 수 있음을 믿으라.

3) 하나님을 찾으려면 한번에 한 사람씩 사랑하라.
야곱이 요셉이 보낸 수레를 타고 애굽으로 내려갈 때 그의 전 가족은 70명 이었다. 하지만 야곱이 147세에 그의 임종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창: 48:4). 야곱이 이 비전을 40세에 받았다고 하면 거의 100년이 지난 시간이지만 야곱은 죽음 직전에 하나님의 비전을 분명히 기억한다. 외적인 상황만 본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계속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이 일에 중심에는 요셉이 있었다. 야곱에게 있어 요셉은 두 가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준다. 첫째. 사랑은 다시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둘째. 완벽하지 않은 사랑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한다. 하나님은 야곱의 불완전한 사랑으로도 요셉같이 훌룡한 용서와 사랑과 생명을 사랑하는 열매를 거두게 하셨다. 또한 죽은 줄 알았던 그 사랑을 다시 부활시키셨다. 우리의 사랑은 예수님처럼 완벽하지 않다. 우리의 사랑은 물거품처럼 되버릴때가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것 보다 계속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신다. 우리가 한번에 한 사람을 사랑하려 할 때 완벽하지 않아도 때로 물거품처럼 되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신다.

당신은 누군가를 축복하고 기도해 주고 있는가? 당신의 슬픔과 고통으로 누군가의 얼굴의 수치와 상처를 닦아주고 있는가? 한 번에 한 사람씩 사랑하고 있는가? 그러면 하나님이 살도록 인도해 주신 땅과 그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