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에 붙들린 사람

사도행전 14:19-28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설교요약>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가장 중요하게 다룬 주제는 성령님의 성품과 특성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내 안에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지 궁금해 한다. 금주 말씀에는 내면에 성령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 내면이 요동치지 않는다
한 영혼의 내면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이 함께 하시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 때 두드러지는 성품의 변화는 어떤 상황 속에도 쉽게 요동치 않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잠 4:23) 울었다가 바로 웃고, 화냈다가 바로 온화해지고, 사랑했다가 바로 미워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다 바로 세상 정욕에 사로잡히고, 칭찬했다가 바로 비난하고, 자신을 너무 좋아했다가 바로 자신을 혐오하며, 기뻐했다가 바로 슬퍼하는 삶이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삶인 것이다. 이런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삶의 결과는 '생명의 근원'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기쁨과 평안이 없으니 슬픔과 허무와 공허가 그 내면을 채운다. 그러나 마음을 지켜주는, 진리이신 예수와 성령, 그리고 말씀이 내면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요동치는 삶에서 흔들림 없는 삶으로 변화하므로 스스로에 대한 후회보다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증가한다. 이러한 삶의 근원적 문제는 그 내면의 마음을 지켜줄 진리가 있는가 없는가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돈도, 명예도, 인기도, 사람도, 결코 우리 삶의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가치들은 우리의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우리를 지켜줄 수 없다. 바위처럼 내면이 견고해지고 있다면 진리되신 성령이 당신의 내면에 살아 계시다는 증거다.

2) 하나님이 주신 양을 삶의 우선 순위에 둔다
무조건 어려운 사역을 하려는 것이 영적이고 성스러운 일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 속에 자신의 야망과 탐욕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음도 깨달아야 한다. 반면 영혼을 향한 사랑 때문에 어려운 일과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의 우선 순위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이 선택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았을까? 바울이 자신을 죽인다 한 의미는 세상의 정욕과 죄와 쾌락을 마음 속에 품게 될 때마다 그 마음들을 죽였다는 걸 의미한다. 자신을 죽인다고 한 고백 속에는 자신도 그런 죄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우리는 가장 어려운 일을 하고,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하고, 자신을 희생할 때에도 죽어지지 않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자아가 있을 수 있다. 그 때마다 그런 자아와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죽여야 한다. 그럼 어떻게 죽여야 할까?

3) 죄성의 태도와 행동들을 죽이기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구한다
우리 스스로는 자신이 가장 많이 희생하고 헌신하고 있고 또한 가장 영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곤 한다. 하나님은 이런 자아를 못박으라 하신다. 성령에 의해 인도되지 못한 자아는 혼자라는 외로움과 무거운 짐으로 인해 그 영혼이 상한다. 그리고 근심과 걱정이 너무 커져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의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심을 믿을 때 우리의 근심은 찬송으로, 걱정은 기도로 바뀐다. 바울은 자신을 정욕과 교만과 차별과 무시로 이끄는 몸의 근성이 있었다. 반면 성스러운 삶을 추구하고, 겸손하며, 희생하는 모습을 추구하려는 은혜도 그 안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정적인 것이 마음에서 제어되지 않아 밖으로 표출되려 할 때, 그런 흉한 죄성의 태도와 행동들을 노예 다루듯 다루었다. 그 때 그가 노예처럼 다룬 몸의 태도와 행동이 다시 마음에 영향을 주어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보기에 아름다운 태도와 행동이 그로부터 흘러나오게 하는 경험을 하였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분의 도움을 구할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우리의 몸이 우리 자신에게 복종하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의 생각과 몸의 행동을 노예 삼고 있는가? 그럴 때마다 뜻하지 않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가? 삶의 우선 순위가 무조건 어려운 일, 어려운 곳으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 안에 있는 양들을 사랑함인가? 당신의 내면에 요동치는 파도가 점점 바위처럼 견고해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께 붙들린 삶을 살고 있다.

거룩은 사역이다

사도행전 14:11-18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설교요약>
사단이 다양한 공격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유혹하는 첫 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그 분을 예배하는 것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오늘날의 교회가 복음을 전해 그들로 채워지길 원하신다.
또한 그들에게 성경을 처음부터 잘 가르쳐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길 원하신다. 이런 일을 할 때 사단은 우리를 영적으로 공격한다. 이런 위협에도 담대하고 평안하게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마귀가 싫어하는 일인지를 인지하는데서부터 나온다. 

사단이 다양한 공격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유혹하는 두번째 이유는 관계는 끊지 못해도 교제라도 끊어 놓길 원하기 때문이다. 성도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그 분과의 교제는 점점 시들해지고 세상의 영광과 쾌락에 취하다 보면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이 어려워 진다. 그렇게 되면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고, 영혼 구원에 무관심해진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안에서 분별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분별의 목적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유지할 때 그 분과 계속 교제하고 그 분의 거룩한 성품과 은혜들을 제대로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단의 유혹들을 무기력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기 위해서 추구해야 할것은 무엇일까?
1) 거룩은 사역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예배할 분은 오직 유일신이신 하나님이다라고 성경은 적고 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거룩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하는 것에서 거룩은 시작된다. 하나님은 나도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어떤 일을 대단하게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거룩이 사역의 첫 번째 목표가 되야 한다. 거룩한 삶은 마음으로 죄를 짖지 않는 것이다. 우린 마음으로 사람을 미워할 때가 있다. 보이지 않기에 쉽게 범하는 죄다. 미움은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음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다 기도하고 성령을 의지해서 그 사람에게 솔직하고 진실하게 대화하는 것이 좋다.

거룩한 삶은 외모에도 세상 사람과 구별됨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마저 세상 사람들의 흉내를 내며 그들의 죄악된 문화를 추앙하며 따라간다. 거룩은 신발을 벗는 것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스스로를 주인이 아닌 종으로 보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거룩에서 나온다. 그 거룩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주어진다. 거룩한 삶을 살면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나와 이땅에서의 일과의 관계도 나와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께 돌아오는 관계도 거룩과 연결되어 있다. 마음과 행동으로 죄를 지었을 때는 빠르게 회게해야 한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의 죄들을 회개하고 또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며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단발적 죄의 용서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함 때문이셨다. 우리 스스로가 거룩한 느낌이 들지 않을 때 더럽고 수치스럽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통로인 예수님으로 다시 하나님의 평안과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면 된다. 그럼 다시 거룩하게 되고 영혼과 뼈 속까지 깨끗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된다. 거룩하면 열정이 불 같이 일어나게 된다. 거룩하면 담대해진다. 거룩하면 기뻐진다. 거룩하면 단순해진다. 거룩하면 어느새 막힌 문이 열린다. 우리 힘만으로는 안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다. 그래서 거룩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한다. 거룩은 관념적 언어가 아니라 사역이 되어야 한다.

2) 옷을 찢고 창조주 하나님을 전하는 열정을 회복하라 .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을 전했다. 구약의 기록된 창조 이야기를 읽어보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며 하나님의 기쁨을 기록했다. 그 세상을 누리고, 즐기고, 성취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창조하셨고, 그가 창조한 사람들로 그가 만든 세상 속에서 마음껏 표현하고, 세상을 가꾸며 관리하도록 하셨다.

그 분이 자신의 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들은 그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신뢰했었는지를 복음서를 통해 보여주셨다. 그 아들의 성품은 거룩하고 온유하고 순결하였으며 사랑 그 자체였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 세상의 온갖 난잡하고 더럽고 추하고 잔인한 자신들을 닮은 신들을 만들어낸 인간들을 용서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까지 하셨다. 그리고 다시 부활시켜 이 세상의 어떤 우상의 신들도 흉내낼 수 없는 증거를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거룩이시다. 하나님은 순결이시다. 하나님은 진실이시다.
그래서 그분께 나가는 자는 다 그 분처럼 변화된다. 그래서 그 분을 만나면 그 분의 성품에 감격해서 이렇게 찬양한다. '당신이 옷을 찢 듯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영혼들은 누구인가? 당신이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거룩의 성품은 무엇인가!'

의미 있는 고통

사도행전 14:1-10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본 적이없는자라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설교요약>
고통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의미가 있는 고통과 의미가 없는 고통이다. 의미 있는 고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미리 예비하신 고통이며 그 안에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때때로 하나님의 일을 하다 크게 고통을 받을 때 우리는 그 일을 회피하거나 적극적으로 주님을 따르길 주저하곤 한다. 그 때 우리가 겪는 고통이 과연 의미 있는 고통인지 아닌지는 다음 네가지 증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길로 인도를 받는다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로 옮겨 온 바울에 의해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가 받은 축복처럼, 하나님이 주신 고통은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금 받는 고통이 하나님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의미 있는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2) 하나님이 주실 축복의 열매에 집중하게 된다
고통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과 축복의 열매에 집중한다. 고통과 가시는 반복된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처럼 고통의 순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람들과 일들에 더욱 자신의 시간과 삶을 드릴 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열매 맺음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 가시로 열매를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열매 속에 가시를 박아두면 시간이 흐르면서 그 열매의 즙들이 가시를 녹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고통 속에서 고통 받음을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열매와 선물들에 집중해야 한다. 

3) 자신의 일을 스스로 컨펌하지 않고 하나님께 컨펌 받으려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을 따르다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그 일을 해결해주셔서 우리가 다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 그러므로 어떤 불가능한 상황 앞에 있을 때가 우리가 주님께 컨펌 받을 때임을 기억하고 간절하게 그 분을 향해 구해야 한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주셔서 하는 일인데 하나님이 기적과 표적으로 컨펌해 주지 않으시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4) 누군가 나를 통해 치유되고 은혜를 받는다
바울이 전한 말씀으로 믿음이 생긴 평생 앉은뱅이였던 루스드라는, 바울이 그를 향해 소리친 후 즉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이야기한다. 성경에서 보듯 하나님은 병자를 치유하시는데 바울을 사용하셨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고, 그 말씀은 루스드라에게 자신이 낳을 수 있다라고 하는 소망을 주었다. 

이 증거들을 통하여 우리는 과연 의미 있는 고난을 받는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고통이기에 그 고통을 통한 축복의 인도도 하나님이 해주실 것을 믿으며 고통 그 자체보다는 우리에게 주실 열매를 기대하여야 한다. 또한 고통 안에서 나아갈 때 스스로가 아닌 하나님께 컨펌을 받아야 하며 다른 누군가가 내 고통을 통해 은혜를 받는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고통임을 알기에 우리는 더 깊숙히 고통 속으로 들어가 견딜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길 것이다. 

인정과 믿음의 차이 2

사도행전 13:13-52 (13:42-52) 
42 저희가 나갈쌔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설교요약>
애굽왕 바로는 10대 재앙을 당하고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자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렇게 고백했다.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출 12:31) 또한 애굽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 12:36) 결국 이런 보석들은 훗날 광야에서 하나님의 성막을 짖는데 헌신하는 재료로 드려진다. 결국 애굽 왕은 다시 마음이 변해 이스라엘 백성을 추적하다 갈라진 홍해에 모두 수장되었다. 요점은 바로와 애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고 그들에게 보석까지 주었으나 하나님을 믿은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이다. 인정하지만 믿지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정하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을 42-52절에 바울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을 믿게된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알 수 있다.

인정이 아닌 믿고 거듭난 사람들의 특징
1) 예배와 말씀을 사모한다. 거듭난 사람들은 정규적인 교회 모임에 사회 활동을 위해 나오지 않고 예배의 말씀을 기대하며 나온다. 당신은 예배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사모하는가? 그렇다면 거듭나 믿는 사람이다.

2) 복음을 전해준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한다. 전에는 세상의 쾌락과 정욕을 쫓는데 관심을 갖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이 가지려 애쓴다.

3)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인 것은 그 전주에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나가서 사람들에게 알렸기 때문이다. 당신 삶 속에 은혜가 있으면 그것은 누군가에게 당신이 받고 있는 것에 대해 흘러 보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믿음이다.

4) 시기와 방해를 받는다. 유대인들이 시기한 내용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외모나 가진 소유나 자녀나 풍부한 누림들이 아니었다. 세상의 시기와 질투는 외적인 것들이지만 영적인 시기와 질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혼이 거듭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곳에 갖힌 영혼들을 구해 내는데 있다. 이것이 사단의 시기이고 방해이다. 그 모든 영적 열매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죽어 있고 고통받는 한 생명을 사망에서 끌어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천국을 살게되는 통로로 드려지면서 받는 시기다.  이것은 당신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통로가 되어 누군가를 구해내고 있는 데서 오는 사단의 시기고 질투인 것이다.

5)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시기를 받아도 담대하다. 우리는 담대히 살고 싶어한다. 두려움이 없는 마음이 담대한 마음이다. 담대하면 평안하다. 마음이 평안하면 더욱 사랑하게 되고 더욱 진실한 사람이 된다. 이런 담대함은 사람의 비위를 맞춘다고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할 때 하늘로부터 주어진다. 당신은 담대한가? 믿음으로 사는 삶의 증거다.

6)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어려움이 오면 무조건 더 낳은 길을 찿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 낳은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사명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7) 믿어지는 은혜를 받은 것을 안다. 믿음의 사람,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고 믿어지는 은혜를 받았음을 찬양하고 기뻐한다. 이 말씀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소망을 준다. 믿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줄 때 항상 경험하는 것은 전혀 기대치 않은 사람들이 간절하게 신중한 태도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때마다 전하는 사람의 자아가 더 많이 깨지고 성령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사실을 믿을 때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된다. 한 사람의 변화는 내 감정이나 생각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8) 기쁨과 성령이 하나님의 의해 주어지는 것을 안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쁨과 성령이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선물임을 안다.

인정과 믿음의 차이 1

사도행전 13:13-52 (13:13-41)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 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 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 오십 년간)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26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35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찌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