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세우시는 성령님

사도행전 15:36-41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설교요약>
1차 선교 여행 이후 바울이 바나바와 마가와 헤어진 약 13년 경에, 마가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도 갔고 하나님 나라 일에 유용하며,  신실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또한 마가는 AD65-70년 경에 마가복음을 썼다. 마가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행동의 복음을 전하며 위로와 소망을 주었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마가를 통해 주는 메세지는, 성령님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때에도 마가와 바나바의 삶과 사역에 동행하시며 마가를 변화시켜가고 계셨다는 것이다. 마가는 연약한 사람이었다. 인내력도 부족했고 힘든 일이 있으면 먼저 부딪쳐 이겨내려고 하기 보다는 회피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가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고, 훗날 마가는 놀라운 종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원치 않는 실망스러운 결정과 행동을 하게될 때가 있다. 그 때 '나는 소망이 없어'라며 크게 절망할 때가 있다. 다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나를 절망 시키는 요소 및 절망의 근본적 원인을 찾아내야만 한다.

현실 도피를 하게 만드는 힘든 어떤 일들은 세상 정욕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대다수의 경우 세상의 죄악된 행위를 하게 만드는 근본적 이유는 현실 도피 자체에 그 원인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이 죄인지 알면서도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현실의 괴로움을 잊기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주님과 함께 해결에 가면 되는데,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문제를 피해 비현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마가도 비록 주님을 따랐지만 처음부터 두려움의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비현실적인 행동과 선택을 하게 하는 근원적인 것이 무엇이고 후회할 일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라. 그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라는 뿌리가 있지 않는가? 그럼 우리를 두려움으로 부터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은 어떤 방법들을 사용하시는지 살펴보자.

하나님은 바나바를 통해 마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그를 다시 만드시고 훈련하시고 세우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두려움 때문에 죄 지음과 현실 도피를 계속 반복하는 사람들이 그 곳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열어 주시려는 새로운 길을 잘 보는 것이다. 또한 자신에게 동행시키시려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훈련들도 잘 받아들여야 한다. 마가에게 다시 주어진 바나바와의 선교 여정에 힘든 일이 없었겠는가? 이전 선교 여행과 같이 똑같은 어려움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가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길을 따라갔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길을 따라가면 내면의 근본적인 두려움은 점점 힘을 잃게 된다. 그 때 새로운 천국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좌절하고 절망할 때 하나님이 새롭게 열어 주시고, 만나게 하시고, 기회를 주시는, 그 길을 잘 따라갈 때 거기서 하나님이 주신 담대함을 얻게 된다.

바울은 바나바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바울은 정확하게 마가의 잘못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마가는 바울의 말을 통해 마음이 찔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밤빌리아에서 이기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들의 마음에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는 처음 가졌던 각오와 달리 힘이 들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마가는 지금 다시 바나바와 함께 다시 선교 여행을 떠나려 하는 것을 볼 때 새로운 결심하고 도전을 감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2차 선교 여행에서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성령님만 의지했을 것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을 세우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이심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그의 또 다른 겸손의 모습, 종의 복음인 마가복음을 기록한 동기일 것이다.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꺾는다.
그러나 그 실패의 두려움은 오직 그가 주만 의지하며 담대하게 나가게 하는 최고의 스승이 되었다.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꺾고 폭풍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줄 아는 사람으로 세우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마가를 통해 마가복음을 남기셨다. 마가와 바나바는 어떻게 보면 그 당시 행적을 기록했던 누가에 의해 선택받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마가는 주목 받지 못했다고해서 주목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 관심을 가졌고 베드로로부터 그 모든 일들을 자세하게 전해 들었고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을 글로 남겨 로마와 열방에 증거가 되게 했다.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은 모두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성경을 썼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저자는 성령이시다. 따라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한 때 사도들을 실망시키고 힘들다고 떠나 버린 마가를 통해 그 놀라운 일을 이루셨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한 시기는AD65-70년 사이다. 그가 처음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고 하나님의 일에 실패한 시기로부터 약 15-20년 이상이 흐른 때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언제 어떻게 어떤 일을 이루실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고 쉽게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생각지 못한 때에 생각치 못한 방법으로 그 분은 그 분의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들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손에 드린 도끼

사도행전 15:1-35 (성경봉독 15:1-5)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하니라

<설교요약>
'한 남자가 하루 온종일 열리는 나무 자르는 대회에  도전했다. 그 도전자는 점심 먹는 시간을 제외 하고는 열심히 나무를 잘랐다. 그러나 상대방 선수는 하루 동안 여러번 휴식을 취했고 여유있게 점심 식사를 했다.  저물어가는 마지막 시간에 도전자는 상대방 선수가 자신이 자른 나무보다 더 많은 나무를 자른 것을 보고 놀라고 화가났다. 그는 상대방 선수에게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내가 당신을 볼 때마다 당신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나보다 더 많은 나무를 잘랐는지 모르겠다' 라고 했다. 승리한 그 상대 선수는 '당신은 한 가지 나에 대해 주목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휴식을 취할 때마다 나의 도끼날을 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바울의 손수건만 병들고 악귀 들린 사람에게 가져다 얹어도 병이 떠나고 악귀도 떠나는 일들도 일어났다.(행 19장) 그런데 이렇게 더 강력한 성령에 능력에 붙들리기 전에 15장에 마치 도끼날을 갈 수 있도록 해 준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 예수님을 믿어도 모세의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다가 점점 식어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도끼날을 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아이 같은 신뢰다
성경은 예수님을 잘 믿다가 다시 율법적인 삶으로 돌아갈수 있는  증거를 보여준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도 처음에 은혜로 선택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서로 경쟁하다가 예수님께 꾸중을 들었다. 그 꾸중을 들은 시점은 제자들이 그 동안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습을 지켜 보다가 서서히 그들 스스로 예수님처럼 병자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복음도 전하는 시기였다. (눅9장/막9장) 따라서 제자들이 사역을 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외적인 능력이 드러나기 시작한 때에 그들은 내가 했다라고 하는 자신들의 율법적인 의가 다시 살아났음이 분명하다. 이 때 예수님이 그들의 율법적인 자기 의를 다시 깨뜨리시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시게 하기 위해 사용하신 것은 어린아이였다.(마:18:3) 어린 아이가 한 것이 무엇이라고 그가 천국에 들어갈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마:18:4)  이 아이가 자기를 낮추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키를 낮추었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비하의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예수님이 시키는 데로 했을 뿐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믿음에 뿌리를 두고있다. 부모를 신뢰하는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인정한 아이다. 그래서 겸손하다.

그리스도인의 나눔이다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통로 중에 하나가 나눔이다. 그 나눔은 단순히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행하신 일들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순수하게 나누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은 자신이  그분을 위해 일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자신을  통해 예수님 자신의 일을 하기 원하시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을 나누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하신 일을 나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이 신실하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그 분께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눌 때 '큰 기쁨'을 주신다.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만나고 나면 적지 않은 시간과 말들을 주고 받았는데 그다지 기쁨을 느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에는 만날 때마다 큰 기쁨이 있다. 나눔이 있는 곳에는 치유가 있고 영혼이 맑아지고 또 만남이 기대가 되고 기쁨이 배가 된다. 이런 나눔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 전에 기도로 그 만남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그 만남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날카롭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해주시며 다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열정으로 전환된다.

지혜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무뎌지게 하고 절망스럽게 하는 요소 중 하나는 '분노' 다. 분노할수록 마음은 슬픔에 사로잡히고, 기쁨은 상실되고, 평안은 깨지며, 두려움은 엄습한다. 분노의 반대말은 온유일 것이다. 그러나 온유하고 싶어도 누군가 마음을 뒤집어 놓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쉽게 무너지곤 할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분노를 잡는 무기를 주셨는데 바로 '지혜' 다. 베드로는 성령의 음성과 환상을 직접 듣고 고넬료에게 가고, 죽은 제자 다비다도 살렸던 사람이다. 감옥에서 천사의 음성을 듣고 초대 교회로 갔던 사람이다. 바울도 성령의 음성을 듣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선교지로 주저하지 않고 떠난 사람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런 음성은 없다. 대신 신실한 사람들과 지혜를 모았고 야고보의 구약 성경 인용 말씀을 종합해 최종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는 신중한 생각, 결정, 대화, 성경 의 적용 모두가 들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적용된 그들의 지혜가 담긴 결정을 권위 있게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때로 성령의 내적인 음성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것을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말씀하시고 결단하게 하신다. 그러나 어떤 때는 우리가 마음의 생각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비추어 어떤 일을 생각하길 원하신다. 이것이 지혜다. 따라서 지식과 지혜의 차이점은 명료하다. 지식은 공부를 통해 어떤 것에 대한 정보를 알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생각을 통한 깨달음으로 바른 선택을 하고 적들의 악한 계획을 파하는 영감과 통찰력을 준다.

당신은 분노를 지혜로 파하는 사람인가? 그럼 도끼날을 가는 사람이다.  성령이 주신 경험과 말씀의 올바른 적용을 위해 생각을 사용하라. 그 때 당신의 영혼은 날카롭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고,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을 하고,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안에 갖힌 영혼을 구해내는 그 분에 손에 들린 도기까 될 것이다. 그 분의 뜻을 정확하게 찍어내는 삶을 살 것이다. 

당신은 지혜를 사용하고 있는가? 당신은 모임을 하고 있는가? 나눔을 하고 있는가? 나눔에는 영적 기쁨이 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같은 신뢰를 위해 영혼을 집중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도끼를 찿고 계신다. 하나님이 찍고 싶은 나무를 정확하게 찍을수 있는 도끼가 되기 위해 자신을 갈고 있는 도끼를 찿고 계신다.

하늘의 장자

창세기 25:27-34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설교요약>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다. 에서는 사냥꾼이 되었고 야곱은 집에서 거하길 좋아했다. 그 런데 주목할 것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판 것이다. 에서는 망설임 없이 죽 한 그릇으로 자신의 장자권을 동생에게  팔아 넘겼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고 성경은 말씀한다. 당시 고대 근동의 문화는 장자권은 부모로부터 받는 물질적인 유산과 관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인 접근 이외에도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을 멸시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고 난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를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야곱은 어머님인 리브가의 도움으로 에서로 분장해서 눈이 잘 안 보이는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숭수 있게 된다. 아마도 리브가는 에서가 헷족속의 딸들인 유딧과 바스맛으로 인해 에서가 하나님을 버리고 문란하게 우상을 숭배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였다. 결국 에서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길을 선택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장자의 축복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에서의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과 은혜들을 멸시함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가 그렇게 멸시하던 장자의 명분을 사모했다.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이 유치하고 야비하기까지 했지만 그가 장자의 직분을 사모한 것은 하나님을 존귀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모든 축복의 시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지, 멸시하는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외적으로 볼 때 혐오스럽고 초라해 보이는 한 사람까지 존귀하게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의 대속은 하나님께서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서 이루실 대속의 그림자, 즉 예고편이었다. 특별히 처음 것을 드리라고 할 때  둘째, 셋째는 그럼 대속이 필요 없는 것일가? 또한 선택 받지 못하거나 열등한 존재인 것일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다. 대속은 누군가 자신의 죄를 위해 댓가를 지불하고 대신 죽은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다. 첫 태어난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난다. 그렇기에 더 이상 첫째가 아니다. 대속 받은 자들은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되 었고 하늘의 장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 계보를 계속 이으려면 동생들은 다시 첫째가 되어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입어야만 한다.

리스트로 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 감람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학적으로 물었다.
A.D 3세기의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그 리고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고 인용했다. 그래서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은 태형에 의해 극도의 고통을 느끼게 되고 저혈량성 쇼크 상태에 빠진다고 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평 들보를 지고 갈보리 언덕으로 비틀거리며 올라가셨다. 그 때 예수님은 저혈량성 쇼크 상태에 있었기에 결국 넘어지셨고, 로마 군인들은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서 '내가 목마르다' 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손과 발에 못이 박히기 전에 이미 위독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심장 박동이 불규칙해져 죽음이 임박했음을 아시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외치신 것이다. 그리고 심장이 정지 되면 서 운명하셨다고 했다. 요한의 설명은 현대의 의사들이 예상하는 바와 일치하고 있다. 이 점 때문에 요한이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있다고 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적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자신은 죄인이고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이 끔찍한 고통을 짊어지신 것을 믿는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예수님이 당신에게 하늘의 장자 명분을 준 것이 믿어 지는가? 그것은 오직 은혜였음이 믿어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하늘의 그 이름이 기록된 장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 많이 들어 자신이 그 분에 대해서 그냥 알고 있는 것인지, 믿고 있는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따라오는 삶의 증거는 '생존을 위한 권리를 주께 드리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와 같이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떠나고 그분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세상의 어떤 눈에 띌만한 죄악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생존을 위한 일 때문일 경우가 많다.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 하늘의 장자가 된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생존권까지 하나님께 드리며 산다.  그리고 그 때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당신은 생존권까지도 주님께 맡기고 사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믿고 있는 사람이다.

성령에 붙들린 사람

사도행전 14:19-28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설교요약>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가장 중요하게 다룬 주제는 성령님의 성품과 특성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내 안에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지 궁금해 한다. 금주 말씀에는 내면에 성령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 내면이 요동치지 않는다
한 영혼의 내면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이 함께 하시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 때 두드러지는 성품의 변화는 어떤 상황 속에도 쉽게 요동치 않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잠 4:23) 울었다가 바로 웃고, 화냈다가 바로 온화해지고, 사랑했다가 바로 미워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다 바로 세상 정욕에 사로잡히고, 칭찬했다가 바로 비난하고, 자신을 너무 좋아했다가 바로 자신을 혐오하며, 기뻐했다가 바로 슬퍼하는 삶이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삶인 것이다. 이런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삶의 결과는 '생명의 근원'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기쁨과 평안이 없으니 슬픔과 허무와 공허가 그 내면을 채운다. 그러나 마음을 지켜주는, 진리이신 예수와 성령, 그리고 말씀이 내면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요동치는 삶에서 흔들림 없는 삶으로 변화하므로 스스로에 대한 후회보다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증가한다. 이러한 삶의 근원적 문제는 그 내면의 마음을 지켜줄 진리가 있는가 없는가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돈도, 명예도, 인기도, 사람도, 결코 우리 삶의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가치들은 우리의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우리를 지켜줄 수 없다. 바위처럼 내면이 견고해지고 있다면 진리되신 성령이 당신의 내면에 살아 계시다는 증거다.

2) 하나님이 주신 양을 삶의 우선 순위에 둔다
무조건 어려운 사역을 하려는 것이 영적이고 성스러운 일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 속에 자신의 야망과 탐욕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음도 깨달아야 한다. 반면 영혼을 향한 사랑 때문에 어려운 일과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의 우선 순위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이 선택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았을까? 바울이 자신을 죽인다 한 의미는 세상의 정욕과 죄와 쾌락을 마음 속에 품게 될 때마다 그 마음들을 죽였다는 걸 의미한다. 자신을 죽인다고 한 고백 속에는 자신도 그런 죄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우리는 가장 어려운 일을 하고,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하고, 자신을 희생할 때에도 죽어지지 않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자아가 있을 수 있다. 그 때마다 그런 자아와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죽여야 한다. 그럼 어떻게 죽여야 할까?

3) 죄성의 태도와 행동들을 죽이기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구한다
우리 스스로는 자신이 가장 많이 희생하고 헌신하고 있고 또한 가장 영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곤 한다. 하나님은 이런 자아를 못박으라 하신다. 성령에 의해 인도되지 못한 자아는 혼자라는 외로움과 무거운 짐으로 인해 그 영혼이 상한다. 그리고 근심과 걱정이 너무 커져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의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심을 믿을 때 우리의 근심은 찬송으로, 걱정은 기도로 바뀐다. 바울은 자신을 정욕과 교만과 차별과 무시로 이끄는 몸의 근성이 있었다. 반면 성스러운 삶을 추구하고, 겸손하며, 희생하는 모습을 추구하려는 은혜도 그 안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정적인 것이 마음에서 제어되지 않아 밖으로 표출되려 할 때, 그런 흉한 죄성의 태도와 행동들을 노예 다루듯 다루었다. 그 때 그가 노예처럼 다룬 몸의 태도와 행동이 다시 마음에 영향을 주어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보기에 아름다운 태도와 행동이 그로부터 흘러나오게 하는 경험을 하였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분의 도움을 구할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우리의 몸이 우리 자신에게 복종하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의 생각과 몸의 행동을 노예 삼고 있는가? 그럴 때마다 뜻하지 않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가? 삶의 우선 순위가 무조건 어려운 일, 어려운 곳으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 안에 있는 양들을 사랑함인가? 당신의 내면에 요동치는 파도가 점점 바위처럼 견고해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께 붙들린 삶을 살고 있다.

거룩은 사역이다

사도행전 14:11-18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설교요약>
사단이 다양한 공격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유혹하는 첫 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그 분을 예배하는 것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오늘날의 교회가 복음을 전해 그들로 채워지길 원하신다.
또한 그들에게 성경을 처음부터 잘 가르쳐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길 원하신다. 이런 일을 할 때 사단은 우리를 영적으로 공격한다. 이런 위협에도 담대하고 평안하게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마귀가 싫어하는 일인지를 인지하는데서부터 나온다. 

사단이 다양한 공격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유혹하는 두번째 이유는 관계는 끊지 못해도 교제라도 끊어 놓길 원하기 때문이다. 성도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그 분과의 교제는 점점 시들해지고 세상의 영광과 쾌락에 취하다 보면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이 어려워 진다. 그렇게 되면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고, 영혼 구원에 무관심해진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안에서 분별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분별의 목적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유지할 때 그 분과 계속 교제하고 그 분의 거룩한 성품과 은혜들을 제대로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단의 유혹들을 무기력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기 위해서 추구해야 할것은 무엇일까?
1) 거룩은 사역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예배할 분은 오직 유일신이신 하나님이다라고 성경은 적고 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거룩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하는 것에서 거룩은 시작된다. 하나님은 나도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어떤 일을 대단하게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거룩이 사역의 첫 번째 목표가 되야 한다. 거룩한 삶은 마음으로 죄를 짖지 않는 것이다. 우린 마음으로 사람을 미워할 때가 있다. 보이지 않기에 쉽게 범하는 죄다. 미움은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음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다 기도하고 성령을 의지해서 그 사람에게 솔직하고 진실하게 대화하는 것이 좋다.

거룩한 삶은 외모에도 세상 사람과 구별됨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마저 세상 사람들의 흉내를 내며 그들의 죄악된 문화를 추앙하며 따라간다. 거룩은 신발을 벗는 것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스스로를 주인이 아닌 종으로 보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거룩에서 나온다. 그 거룩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주어진다. 거룩한 삶을 살면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나와 이땅에서의 일과의 관계도 나와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께 돌아오는 관계도 거룩과 연결되어 있다. 마음과 행동으로 죄를 지었을 때는 빠르게 회게해야 한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의 죄들을 회개하고 또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며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단발적 죄의 용서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함 때문이셨다. 우리 스스로가 거룩한 느낌이 들지 않을 때 더럽고 수치스럽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통로인 예수님으로 다시 하나님의 평안과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면 된다. 그럼 다시 거룩하게 되고 영혼과 뼈 속까지 깨끗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된다. 거룩하면 열정이 불 같이 일어나게 된다. 거룩하면 담대해진다. 거룩하면 기뻐진다. 거룩하면 단순해진다. 거룩하면 어느새 막힌 문이 열린다. 우리 힘만으로는 안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다. 그래서 거룩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한다. 거룩은 관념적 언어가 아니라 사역이 되어야 한다.

2) 옷을 찢고 창조주 하나님을 전하는 열정을 회복하라 .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을 전했다. 구약의 기록된 창조 이야기를 읽어보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며 하나님의 기쁨을 기록했다. 그 세상을 누리고, 즐기고, 성취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창조하셨고, 그가 창조한 사람들로 그가 만든 세상 속에서 마음껏 표현하고, 세상을 가꾸며 관리하도록 하셨다.

그 분이 자신의 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들은 그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신뢰했었는지를 복음서를 통해 보여주셨다. 그 아들의 성품은 거룩하고 온유하고 순결하였으며 사랑 그 자체였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 세상의 온갖 난잡하고 더럽고 추하고 잔인한 자신들을 닮은 신들을 만들어낸 인간들을 용서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까지 하셨다. 그리고 다시 부활시켜 이 세상의 어떤 우상의 신들도 흉내낼 수 없는 증거를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거룩이시다. 하나님은 순결이시다. 하나님은 진실이시다.
그래서 그분께 나가는 자는 다 그 분처럼 변화된다. 그래서 그 분을 만나면 그 분의 성품에 감격해서 이렇게 찬양한다. '당신이 옷을 찢 듯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영혼들은 누구인가? 당신이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거룩의 성품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