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슬픔

사도행전 16:16-34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설교요약>
영혼에 대한 슬픔
바울과 그 일행들은 이방인 루디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기도하는 곳으로 가다가 점치는 귀신이 들린 노예 소녀를 만나게 된다. 이 소녀는 귀신의 영에 사로잡힌 고통은 물론, 점을 쳐주고 번 돈 모두를 자신의 주인에게 바쳐야 하는 이중고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소녀 안에 귀신은 바울과 그 일행이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음을 알고도 소녀 안에서 머물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들이라” 라고 하며 계속해서 크게 외쳐댔다. 바울이 몹시 괴로워하며 귀신을 쫓아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괴로움이란 슬픔으로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번역된다. 따라서 바울이 이 귀신 들린 소녀를 보면서 가졌던 내면의 괴로움은 한 영혼이 받는 고통에 대한 큰 슬픔 또한 동반된 것임을 분명하다. 그래서 소녀를 통해 유익을 얻고 있는 주인으로 해를 입을 수 있음을 알았알 것임에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에게 그 아이에게 떠나도록 명령했고, 아이는 결국 자유케 되었다. 결국 그의 슬픔이 한 영혼을 풀어주는 생명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실 때 그 분을 위해 우는 자들을 향해, 십자가의 예수님을 볼 때마다 자신이 지은 죄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준 것을 슬퍼하며 울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즉 가족과 타인의 영혼 구원을 위해 울라고 하셨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애통함으로 울고 있다면 당신은 복 받은 사람이다.

슬픔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근본적인 원인
귀신 들린 소녀의 주인들은 여종이 당하는 고통은 안중에 없이, 그로 인해 얻는 재물이 더 소중했다. 이렇듯 탐욕에 빠진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슬픔은 없고, 오직 악한 슬픔만이 가득하다. 이 귀신 들린 아이를 노예로 부려 수익을 얻은 여러 주인들 중 단 한 명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고, 회개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애통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타인의 아픔 때문에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약속 하셨다. 그렇기에 이 소녀를 악용한 주인들의 내면에는 진정한 '위로'가 없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에 칭찬과 위로가 필요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 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을 하셨다. 이것은 모든 창조물에 하나님의 칭찬을 갈망하는 본능을 심어 놓으셨음 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칭찬과 위로 탱크를 자신의 위로와 칭찬으로 채우신다. 특히 채우는 과정 중 중요한건 '보시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 분이 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의 내면에 위로와 칭찬이 채워진다. 그 위로와 칭찬은 우리의 내면에 탐욕과 정욕이 근접하지 못하게 우리를 더욱 거룩한 열정들로 내면을 뜨겁게 한다. 그런데 내면에 하나님, 예수님이 없는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 사람들을 보려 하지 않고, 사람들을 낮은 곳에서 자신을 하나님처럼 우러러 보라고 압박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을 대신해서 사람들을 봐 줄 사람들, 칭찬하고 격려할 사람들을 찾으신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늘의 위로를 부어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정반대의 상황으로 보내실 때 크게 세 종류의 반응을 보인다.
1)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리한다.
2) 몸은 가까이 있지만, 마음이 멀어진다.
3) 그래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마음과 몸을 다하여 주를 계속 따라가는 사람이다.
바울과 실라는 세 번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한밤 중에 아프고 힘들어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기도하고 찬송했다. 그 때 지진이 나고 손발로 묶인 쇠사슬이 모두 풀어졌다. 하지만 간수의 처지를 알고 옥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 받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를 위해 살다 당한 어려운 상황들로 모든 것을 쉽게 속단해선 안된다.  바울이 감옥에 갖힘으로 인해 하나님은 간수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에는, 그냥 찬송하고 기도하라. 그럼 다음은 하나님이 길을 알려주신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우리의 그 어떤 짐보다 우리 존재 자체를 가장 무겁게 느낄 때가 많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은 자기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짐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 짊어지신다고 하셨다. 그럼 그 분이 나를 짊어지시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첫째. 하루 종일 모든 일과 만남 속에서 그분이 나를 어떻게 짊어지시는지 기대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둘째. 그분이 나를 짊어지신 일들을 감사하며, 구체적으로 하루를 기록으로 마감한 다음, 종종 그것들을 다시 보는 것이다.

헛되지 않은 일

사도행전 16:1-15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4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설교요약>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헌신하면서 지칠 때가 있다. 주의 일을 평생 사는 동안 얼마 동안은 할 수 있지만 '항상'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바울은 항상 주의 일에 힘쓰라고 했다. 항상 주의 일에 힘써야 하는 이유는 '그 수고가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이유를 밝혔다.

하나님이 심기 원하시는 일
바울은 예수를 믿으면, 그 분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나 새로운 삶을 살다가, 육체의 생명이 다하면 그 영혼이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혈과육이 아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고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날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예수님께서 이땅에 다시 오실 때 죽어 흙으로 돌아간 육체도 다시 부활의 몸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주의 일' '헛되지 않는다'고 말한 그 일은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롭게 성령으로 거듭난 일을 말한다. 그들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이 땅에서 영적인 부활의 삶을 살아가면서 이 땅에 천국을 가져오는 통로가 된다. 그리고 그들이 성장하여 제자가 되어, 예수님처럼 삶을 살면서 또 다른 영혼들을 거듭나게 한다. 그리고 그들로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살게 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는 헌신의 삶을 살도록 돕는다.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할지, 어떻게 입을지, 무엇을 마실지 준비하며 살까 걱정하고 혼동스러워한다. 당신은 어떤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슨 일을 해야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인도 받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으로 심고 있는 사람이다. 주의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헛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헛되지 않은 주의 일을 하며 성령으로 심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성령의 증거들
1) 갈 길과 해야할 일을 인도 받는다
우리가 헛되지 않은 주의 일에 우리의 삶을 고정하고 삶을 드릴 때, 하나님은 그 때 그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정을 내리도록 쉽게 인도하고 계심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해야할 지 분별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가 주의 나라와 그분의 일을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셔서 그 분이 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주신다.

2)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은; 성령의 갈망을 감지하는 것이다
바울은 1차 선교 여행처럼 아시아 즉, 그가 전에 활동했던 곳으로 떠나려 했는데, 그 길을 성령이 막으시는 걸 감지 했다. 바울 일행은 분명한 계획을 세웠었다. 그들은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성령이 막으셔서 다시 비두니아(터키 북부지역)로 가려고 무시아에 도착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 분을 전심으로 따르고 구하고 순종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갈망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타내신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세운 계획이 있다 할지라도 성령이 그 세운 계획들을 막으시는 것 같을 때 그 계획을 내려 놓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3)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에게 임하는 축복은; 기도로 도울 자를 만난다
바울은 기도처를 찾다가 강가에서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곳에서 옷감 장사를 하던 루디아의 마음을 하나님이 여셔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여인은 강권하여 자신에 집에 바울 일행을 머물게 했다. 바울 일행이 처음에 빌립보에 도착했을 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도하는 곳을 찿으러 가다가 루디아를 만난 일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은 단 번에 루디아를 통해 그들의 의, 식, 주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주의 일에 힘쓰는 삶을 살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고 하는 환상을 보고 막상 순종하여 행동해도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하려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만남의 축복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순종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쉽게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바로 기도해야 할 때이다. 기도할 장소를 찾아야 할 때인 것이다.

당신은 주의 일에 힘쓰고 있는가? 성령으로 심고 있는가? 이것이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에게 임하는 축복들이다. 헛되지 않은 일에 당신의 생애를 드리고 싶지 않은가?

다시 세우시는 성령님

사도행전 15:36-41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설교요약>
1차 선교 여행 이후 바울이 바나바와 마가와 헤어진 약 13년 경에, 마가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도 갔고 하나님 나라 일에 유용하며,  신실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또한 마가는 AD65-70년 경에 마가복음을 썼다. 마가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행동의 복음을 전하며 위로와 소망을 주었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마가를 통해 주는 메세지는, 성령님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때에도 마가와 바나바의 삶과 사역에 동행하시며 마가를 변화시켜가고 계셨다는 것이다. 마가는 연약한 사람이었다. 인내력도 부족했고 힘든 일이 있으면 먼저 부딪쳐 이겨내려고 하기 보다는 회피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가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고, 훗날 마가는 놀라운 종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원치 않는 실망스러운 결정과 행동을 하게될 때가 있다. 그 때 '나는 소망이 없어'라며 크게 절망할 때가 있다. 다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나를 절망 시키는 요소 및 절망의 근본적 원인을 찾아내야만 한다.

현실 도피를 하게 만드는 힘든 어떤 일들은 세상 정욕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대다수의 경우 세상의 죄악된 행위를 하게 만드는 근본적 이유는 현실 도피 자체에 그 원인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이 죄인지 알면서도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현실의 괴로움을 잊기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주님과 함께 해결에 가면 되는데,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문제를 피해 비현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마가도 비록 주님을 따랐지만 처음부터 두려움의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비현실적인 행동과 선택을 하게 하는 근원적인 것이 무엇이고 후회할 일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라. 그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라는 뿌리가 있지 않는가? 그럼 우리를 두려움으로 부터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은 어떤 방법들을 사용하시는지 살펴보자.

하나님은 바나바를 통해 마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그를 다시 만드시고 훈련하시고 세우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두려움 때문에 죄 지음과 현실 도피를 계속 반복하는 사람들이 그 곳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열어 주시려는 새로운 길을 잘 보는 것이다. 또한 자신에게 동행시키시려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훈련들도 잘 받아들여야 한다. 마가에게 다시 주어진 바나바와의 선교 여정에 힘든 일이 없었겠는가? 이전 선교 여행과 같이 똑같은 어려움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가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길을 따라갔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길을 따라가면 내면의 근본적인 두려움은 점점 힘을 잃게 된다. 그 때 새로운 천국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좌절하고 절망할 때 하나님이 새롭게 열어 주시고, 만나게 하시고, 기회를 주시는, 그 길을 잘 따라갈 때 거기서 하나님이 주신 담대함을 얻게 된다.

바울은 바나바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바울은 정확하게 마가의 잘못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마가는 바울의 말을 통해 마음이 찔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밤빌리아에서 이기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들의 마음에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는 처음 가졌던 각오와 달리 힘이 들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마가는 지금 다시 바나바와 함께 다시 선교 여행을 떠나려 하는 것을 볼 때 새로운 결심하고 도전을 감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2차 선교 여행에서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성령님만 의지했을 것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을 세우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이심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그의 또 다른 겸손의 모습, 종의 복음인 마가복음을 기록한 동기일 것이다.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꺾는다.
그러나 그 실패의 두려움은 오직 그가 주만 의지하며 담대하게 나가게 하는 최고의 스승이 되었다.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꺾고 폭풍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줄 아는 사람으로 세우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마가를 통해 마가복음을 남기셨다. 마가와 바나바는 어떻게 보면 그 당시 행적을 기록했던 누가에 의해 선택받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마가는 주목 받지 못했다고해서 주목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 관심을 가졌고 베드로로부터 그 모든 일들을 자세하게 전해 들었고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을 글로 남겨 로마와 열방에 증거가 되게 했다.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은 모두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성경을 썼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저자는 성령이시다. 따라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한 때 사도들을 실망시키고 힘들다고 떠나 버린 마가를 통해 그 놀라운 일을 이루셨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한 시기는AD65-70년 사이다. 그가 처음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고 하나님의 일에 실패한 시기로부터 약 15-20년 이상이 흐른 때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언제 어떻게 어떤 일을 이루실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고 쉽게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생각지 못한 때에 생각치 못한 방법으로 그 분은 그 분의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들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손에 드린 도끼

사도행전 15:1-35 (성경봉독 15:1-5)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하니라

<설교요약>
'한 남자가 하루 온종일 열리는 나무 자르는 대회에  도전했다. 그 도전자는 점심 먹는 시간을 제외 하고는 열심히 나무를 잘랐다. 그러나 상대방 선수는 하루 동안 여러번 휴식을 취했고 여유있게 점심 식사를 했다.  저물어가는 마지막 시간에 도전자는 상대방 선수가 자신이 자른 나무보다 더 많은 나무를 자른 것을 보고 놀라고 화가났다. 그는 상대방 선수에게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내가 당신을 볼 때마다 당신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나보다 더 많은 나무를 잘랐는지 모르겠다' 라고 했다. 승리한 그 상대 선수는 '당신은 한 가지 나에 대해 주목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휴식을 취할 때마다 나의 도끼날을 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바울의 손수건만 병들고 악귀 들린 사람에게 가져다 얹어도 병이 떠나고 악귀도 떠나는 일들도 일어났다.(행 19장) 그런데 이렇게 더 강력한 성령에 능력에 붙들리기 전에 15장에 마치 도끼날을 갈 수 있도록 해 준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 예수님을 믿어도 모세의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다가 점점 식어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도끼날을 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아이 같은 신뢰다
성경은 예수님을 잘 믿다가 다시 율법적인 삶으로 돌아갈수 있는  증거를 보여준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도 처음에 은혜로 선택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서로 경쟁하다가 예수님께 꾸중을 들었다. 그 꾸중을 들은 시점은 제자들이 그 동안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습을 지켜 보다가 서서히 그들 스스로 예수님처럼 병자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복음도 전하는 시기였다. (눅9장/막9장) 따라서 제자들이 사역을 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외적인 능력이 드러나기 시작한 때에 그들은 내가 했다라고 하는 자신들의 율법적인 의가 다시 살아났음이 분명하다. 이 때 예수님이 그들의 율법적인 자기 의를 다시 깨뜨리시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시게 하기 위해 사용하신 것은 어린아이였다.(마:18:3) 어린 아이가 한 것이 무엇이라고 그가 천국에 들어갈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마:18:4)  이 아이가 자기를 낮추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키를 낮추었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비하의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예수님이 시키는 데로 했을 뿐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믿음에 뿌리를 두고있다. 부모를 신뢰하는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인정한 아이다. 그래서 겸손하다.

그리스도인의 나눔이다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통로 중에 하나가 나눔이다. 그 나눔은 단순히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행하신 일들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순수하게 나누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은 자신이  그분을 위해 일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자신을  통해 예수님 자신의 일을 하기 원하시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을 나누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하신 일을 나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이 신실하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그 분께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눌 때 '큰 기쁨'을 주신다.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만나고 나면 적지 않은 시간과 말들을 주고 받았는데 그다지 기쁨을 느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에는 만날 때마다 큰 기쁨이 있다. 나눔이 있는 곳에는 치유가 있고 영혼이 맑아지고 또 만남이 기대가 되고 기쁨이 배가 된다. 이런 나눔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 전에 기도로 그 만남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그 만남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날카롭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해주시며 다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열정으로 전환된다.

지혜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무뎌지게 하고 절망스럽게 하는 요소 중 하나는 '분노' 다. 분노할수록 마음은 슬픔에 사로잡히고, 기쁨은 상실되고, 평안은 깨지며, 두려움은 엄습한다. 분노의 반대말은 온유일 것이다. 그러나 온유하고 싶어도 누군가 마음을 뒤집어 놓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쉽게 무너지곤 할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분노를 잡는 무기를 주셨는데 바로 '지혜' 다. 베드로는 성령의 음성과 환상을 직접 듣고 고넬료에게 가고, 죽은 제자 다비다도 살렸던 사람이다. 감옥에서 천사의 음성을 듣고 초대 교회로 갔던 사람이다. 바울도 성령의 음성을 듣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선교지로 주저하지 않고 떠난 사람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런 음성은 없다. 대신 신실한 사람들과 지혜를 모았고 야고보의 구약 성경 인용 말씀을 종합해 최종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는 신중한 생각, 결정, 대화, 성경 의 적용 모두가 들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적용된 그들의 지혜가 담긴 결정을 권위 있게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때로 성령의 내적인 음성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것을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말씀하시고 결단하게 하신다. 그러나 어떤 때는 우리가 마음의 생각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비추어 어떤 일을 생각하길 원하신다. 이것이 지혜다. 따라서 지식과 지혜의 차이점은 명료하다. 지식은 공부를 통해 어떤 것에 대한 정보를 알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생각을 통한 깨달음으로 바른 선택을 하고 적들의 악한 계획을 파하는 영감과 통찰력을 준다.

당신은 분노를 지혜로 파하는 사람인가? 그럼 도끼날을 가는 사람이다.  성령이 주신 경험과 말씀의 올바른 적용을 위해 생각을 사용하라. 그 때 당신의 영혼은 날카롭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고,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을 하고,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안에 갖힌 영혼을 구해내는 그 분에 손에 들린 도기까 될 것이다. 그 분의 뜻을 정확하게 찍어내는 삶을 살 것이다. 

당신은 지혜를 사용하고 있는가? 당신은 모임을 하고 있는가? 나눔을 하고 있는가? 나눔에는 영적 기쁨이 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같은 신뢰를 위해 영혼을 집중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도끼를 찿고 계신다. 하나님이 찍고 싶은 나무를 정확하게 찍을수 있는 도끼가 되기 위해 자신을 갈고 있는 도끼를 찿고 계신다.

하늘의 장자

창세기 25:27-34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설교요약>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다. 에서는 사냥꾼이 되었고 야곱은 집에서 거하길 좋아했다. 그 런데 주목할 것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판 것이다. 에서는 망설임 없이 죽 한 그릇으로 자신의 장자권을 동생에게  팔아 넘겼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고 성경은 말씀한다. 당시 고대 근동의 문화는 장자권은 부모로부터 받는 물질적인 유산과 관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인 접근 이외에도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을 멸시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고 난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를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야곱은 어머님인 리브가의 도움으로 에서로 분장해서 눈이 잘 안 보이는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숭수 있게 된다. 아마도 리브가는 에서가 헷족속의 딸들인 유딧과 바스맛으로 인해 에서가 하나님을 버리고 문란하게 우상을 숭배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였다. 결국 에서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길을 선택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장자의 축복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에서의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과 은혜들을 멸시함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가 그렇게 멸시하던 장자의 명분을 사모했다.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이 유치하고 야비하기까지 했지만 그가 장자의 직분을 사모한 것은 하나님을 존귀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모든 축복의 시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지, 멸시하는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외적으로 볼 때 혐오스럽고 초라해 보이는 한 사람까지 존귀하게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의 대속은 하나님께서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서 이루실 대속의 그림자, 즉 예고편이었다. 특별히 처음 것을 드리라고 할 때  둘째, 셋째는 그럼 대속이 필요 없는 것일가? 또한 선택 받지 못하거나 열등한 존재인 것일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다. 대속은 누군가 자신의 죄를 위해 댓가를 지불하고 대신 죽은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다. 첫 태어난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난다. 그렇기에 더 이상 첫째가 아니다. 대속 받은 자들은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되 었고 하늘의 장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 계보를 계속 이으려면 동생들은 다시 첫째가 되어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입어야만 한다.

리스트로 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 감람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학적으로 물었다.
A.D 3세기의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그 리고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고 인용했다. 그래서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은 태형에 의해 극도의 고통을 느끼게 되고 저혈량성 쇼크 상태에 빠진다고 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평 들보를 지고 갈보리 언덕으로 비틀거리며 올라가셨다. 그 때 예수님은 저혈량성 쇼크 상태에 있었기에 결국 넘어지셨고, 로마 군인들은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서 '내가 목마르다' 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손과 발에 못이 박히기 전에 이미 위독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심장 박동이 불규칙해져 죽음이 임박했음을 아시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외치신 것이다. 그리고 심장이 정지 되면 서 운명하셨다고 했다. 요한의 설명은 현대의 의사들이 예상하는 바와 일치하고 있다. 이 점 때문에 요한이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있다고 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적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자신은 죄인이고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이 끔찍한 고통을 짊어지신 것을 믿는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예수님이 당신에게 하늘의 장자 명분을 준 것이 믿어 지는가? 그것은 오직 은혜였음이 믿어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하늘의 그 이름이 기록된 장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 많이 들어 자신이 그 분에 대해서 그냥 알고 있는 것인지, 믿고 있는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따라오는 삶의 증거는 '생존을 위한 권리를 주께 드리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와 같이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떠나고 그분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세상의 어떤 눈에 띌만한 죄악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생존을 위한 일 때문일 경우가 많다.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 하늘의 장자가 된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생존권까지 하나님께 드리며 산다.  그리고 그 때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당신은 생존권까지도 주님께 맡기고 사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믿고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