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짐

요한복음 11:37-44
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설교요약>
나사로는 죽은 지 사흘이 지나 다시 살아났다. 예수님이 무덤 밖에서 나사로를 살아나오라 불러내셨을 때, 그를 장사 시 수족에 동였던 베와 수건이 얼굴에 싸여진 채로 무덤으로부터 걸어나왔다. 이 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일러 수건과 베로 싸인 그의 몸을 풀어놓아 주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살아났지만, 어떤 것에 묶여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사람은 내면에도 양면성이 있다. 선하고 평안해 보이지만, 한편  활화산처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내면의 볼케이노는 풀어짐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를 풀어주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풀어줄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는 기도로 풀어주라
아합왕과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와 죄악으로 하나님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셨다(약 5:17). 그러나 3년 6개월이 지나 엘리야에게 비를 약속하셨다. 약속을 받았음에도 엘리야는 비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비 올 기미는 0%도 없었다. 왜 하나님은 비를 약속하시고도 엘리야가 7번 기도하게 하시고, 7번째 마저도 비 대신 손바닥만한 구름만 보여 주셨을까? 이 일로 크게 세 가지가 풀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엘리야의 겸손이 풀어졌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우상 숭배하는 제사장 850명을 모았다. 그리고 바알의 제단을 쌓게 하고 그들의 신에게 구하게 했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엘리야도 자신의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간구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내린 불이 제단 나무, 제물 및 도랑물까지 모두 태웠다. 이것을 본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외쳤다. 그는 한 순간에 하나님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그 후 기도하는 것이 쉽게 응답받지 못하자, 그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고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 기도해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 내면에 겸손이 풀어지길 원하신다.

둘째. 사환의 긍정적 눈이 풀어졌다. 
엘리야가 사환에게 바다를 바라보라 할 때, 사환은 아무것도 없다고 보고했다. 엘리야가 이른 대로 일곱번을 확인하러 가면서 사환은 포기하지 않는 엘리야의 믿음을 보았다. 그리고 일곱번째도 빗방울이 아니라 손바닥만한 구름 조각 하나만 보았다. 측량 불가능하고 무한한 하늘에서 손바닥만한 구름을 본 사환의 눈은 믿음의 눈이었다. 엘리야는 그 작은 구름을 보고 아합에게 비에 막하지 않게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라 선포했다. 상황이 좋을 때는 누구나 긍정적이고 기뻐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안좋으면  부정의 심리도 드러난다. 사환은 부정적 상황에서 엘리야의 큰 소망과 포기하지 않는 긍정적 믿음과 기도를 보았다. 믿음의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낳는다. 이 때 이 것을 본 두려움에 쌓인 부정적인 주변 사람들의 소망이 내면에서 풀어지기 시작한다. 소망은 소망을 낳는다.

셋째. 선포가 풀어졌다
엘리야는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고 아합 왕에게 큰 비가 올 것처럼 미리 선포했다. 하나님은 손바닥만한 구름을 통해 엘리야로 담대히 선포하도록 풀어놓으셨다. 그리고 그 선포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주시는 단어를 붙들고 기도하라. 성령의 감동을 붙들고 선포하며 기도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선포한대로 행하신다.
예수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믿음으로 준비하고 행동하길 원하신다. 부족함과 불가능과 부정적 상황 속에서 겸손이 풀어지고, 부정적인 사람들 내면에 소망과 긍정이 풀어지고 선포가 풀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바다 같은 아름다움도 있지만, 분출하는 용암과 같은 분노도 있고 아픔도 있다. 어떤 용암은 조용히 바다로 흘러들어 육지를 만들 듯 그 삶의 지경을 넓힌다. 반면 어떤 용암은 땅을 뒤덮고 파괴하듯, 분노로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스스로의 삶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어떻게 풀어지는가의 차이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분노가 풀어질 때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기회가 된다.

하나님은 오늘도 부족함과 위기의 부정적 상황을 통해 많은 것을 풀으신다. 당신이 처한 부정적 상황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받고자  하시는 당신의 태도와 믿음과 행동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번 사우스 다코타 선교를 통해 풀어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푸시고 계신가?

차고 넘치는 행복

요한일서 4:7-12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설교 요약>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하버드대 로버트 왈딩거 박사팀의 75년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결코 부와 명예 또는 노력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성취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건 “좋은 관계’라는 사실이 그들이 발견한 가장 분명한 메세지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일보다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런 결과가 사실 조금도 놀랍지 않다. 하지만 왜 우리는 부와 명예를 위해 열심히 살면 행복해질거라는 허망한 거짓에 반복적으로 속으며 계속해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고 있을까?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시간들을 아깝게 여기고, 더 많이 벌고, 더 높은 자리로 오르는 것을 위해 우리들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걸까? 이유는 ‘죄’ 때문이라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죄가 우리에게 들어와 저지른 일이 사람간의 관계를 깨트리는 일이었다. 사람들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죄로 인해 깨어졌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깨졌고, 그 영향으로 인간 사이의 관계도 깨진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와 해결방법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바로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행복과 건강은 로버트 왈딩거 박사팀의 연구 결과처럼 우리가 맺는 '관계'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설 때에만 가능하다. 하나님과 화목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두둔하거나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행위를 극히 혐오하신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법을 바꾸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 일을 행하셨다. 악인을 의롭다 하시고, 의인을 악인으로 재판에 넘기시어 형벌과 죽음의 고통을 겪게 하셨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한 인간이 모든 인류의 가치를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이 자식처럼 지으셔서 함께 그 분의 피조물들을 관리하게 한 아담의 가치를 대신할 피조물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 아담의 모든 자손들을 다 합친 가치를 가진 존재는 창조주 하나님밖에는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두 가지 자격을 가진 유일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바르게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것이다. 단지 갈등이 없는 평화와 평안의 상태가 아니라 행복을 동시에 의미하는 화목제물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신 방법이라 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로마서 5:8

헷세드_상대방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
헷세드는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방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화목제물을 통해 죄를 짓기 전 아담의 신분과 권세를 회복했다. 이제 법적으로 신분이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관계 속에서 진정한 화목을 이루었는가? 한 집에서 최소 몇 시간을 함께 보내는 가족이 일주일에 단 몇 분 정도만 대화를 한다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화목하다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지 못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서운한 점이 있는가? 하나님이 두려운가? 어떤 계기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하게 되었을까? 기대하지 않는 마음, 마음을 터놓지 않은 태도가 그 분과의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하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 삶에 어렵고 힘든 문제를 허락하실 때가 있다. 그런 때에 하나님께 서운하고, 원망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혹시 그 계기로 인해 하나님께 등 돌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삶에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어려움을 허락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는데 그런 때에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그 분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동일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레미야 29:11

여러분 중에 혹시 어떤 시련의 기억 때문에, 응답되지 않은 기도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이제는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길 바란다. 예수님을 만나고 풀어진 관계는 셀 수 없이 많다. 진정한 화목은 하나님과 먼저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함축적이고 분명한 계명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해야 이웃과도 화목할 수 있다.

꺼지지 않는 은혜

나훔 1:1-8
1 이것은 엘고스 사람 나훔이, 니느웨가 형벌을 받을 것을 내다보고 쓴 묵시록이다.
2 주님은 질투하시며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원수를 갚으시고 진노하시되, 당신을 거스르는 자에게 원수를 갚으시며, 당신을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하신다.
3 주님은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고 권능도 한없이 많으시지만, 주님은 절대로, 죄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회오리바람과 폭풍은 당신이 다니시는 길이요, 구름은 발 밑에서 이는 먼지이다. 
4 주님께서는 바다를 꾸짖어 말리시고,모든 강을 말리신다. 바산과 갈멜의 숲이 시들며, 레바논의 꽃이 이운다. 
5 주님 앞에서 산들은 진동하고, 언덕들은 녹아 내린다.그의 앞에서 땅은 뒤집히고,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곤두박질한다.
6 주님께서 진노하실 때에 누가 감히 버틸 수 있으며, 주님께서 분노를 터뜨리실 때에 누가 감히 견딜 수 있으랴? 주님의 진노가 불같이 쏟아지면, 바위가 주님 앞에서 산산조각 난다.
7 주님은 선하시므로, 환난을 당할 때에 피할 피난처가 되신다. 주님께 피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보살펴 주시지만,
8 니느웨는 범람하는 홍수로 쓸어 버리시고, 원수들을 흑암 속으로 던지신다.

<설교 요약>
유대인들은 원래 성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지만 포로생활 이후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해서 회당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할 당시에는 5개 정도의 (에세네파, 열심당, 헤롯파, 사두개파, 바리새파) 당파들이 존재했으며 그들은 율법을 정치적, 종교적 유익에 따라 판단하고 해석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속사적 성취를 이루는 데 일조하게 된다. 특히 바리새파들은 유다가 멸망한 이유가 바로 율법에 대한 무지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불순종으로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교리화하고 체계화했지만 성경을 잘못 이해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했고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다. 

오늘의 본문은 엘고스 사람 나훔이 앗수르에게 주는 멸망의 메시지이다. 그의 예언은 니느웨 백성이 요나를 통해서 회개했지만 다시 옛 행위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진노한 메시지이다. 마태복음 12: 38-45에 보면 주님께서 니느웨 백성이 회개한 모습을 회개치 않는 바리새인들과 비교하신다. 요나서와 나훔서는 니느웨의 멸망과 회개를 촉구하는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요나서는 회개로 그 성이 심판에서 구원받았고 나훔서는 다시 타락한 그 성이 회개를 촉구하지만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두 책은 시간적으로 한 세대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성의 운명도 구원과 심판이 별개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우리에게도 요나의 시대와 나훔의 시대가 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고 회개를 통해서 구원의 기쁨을 누렸지만 나훔의 시대와 바리새인과 같이 형식적인 기도와 봉사, 열심으로 살 때도 있다. 하나님은 선하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지 않으면 심판 하신다. 만약에 우리가 죄를 지어도 심판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고아인 것이다. 심판은 두렵지만 심판을 보류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회개할 수 있다. 

나훔 1장에서 2-7절에 하나님의 다섯 가지 성품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은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다. 그 어떤 은혜와 열심으로 하나님을 따르던 사람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예수님께 죄를 회개하며 구원의 길을 가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한 모든 진노가 십자가 위로 쏟기 때문이다. 둘째는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다. 셋째는 하나님은 권능이 크신 분이다. 도저히 무너질 수 없던 견고한 니느웨성도 홍수로 인해서 쉽게 무너진다. 우리의 성공과 열심으로 쌓아온 견고한 것도 하나님 앞에서 티끌이다. 넷째는 하나님은 진노하실 때는 무섭게 진노하시는 분이다. 노아시대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처럼 하나님은 우상숭배와 죄악을 싫어한다. 우리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섬겨도 바리새인과 같이 외식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죄를 범할 수 있다. 다섯째는 하나님은 선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제 2의 요나와 같이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의인의 삶으로 살아갈 때 선하신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임하신다.  그럼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나훔서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죄가 나온다. 그것은 바로 교만의 죄이다. 이 교만은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전혀 생각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 교만의 결과는 패망의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신다. 바울과 스데반 집사 같이 바리새인으로 태어나 자라지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꺼지지 않은 은혜이다.

진리와 사랑을 입으라

에베소서 6:10-14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설교요약>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때 에베소에 교회를 세우고, 3차 선교 여행 때는 에베소의 두란노에서 2년 동안 제자들을 양육하면서 에베소 교회를 영적으로 활기찬 교회로 세우게 된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이 바로 에베소서인데, 그 서신은 성도들에게 영적 싸움에 대해 알려준다. 특히 1장에서 에베소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며 믿음으로 산 것에 대해, 바울은 늘 감사했지만 편지에 마지막 부분에서는 성령 충만한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더욱 더 그 분의 힘으로 강해져야 한다는 권면의 말씀을 하게 된다. 그럼 왜 주 안에서 더 강해져야 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11절에 나오는 마귀의 간계(길, 방법)이다. 따라서 성도가 믿음과 사랑이 있고 스스로 선 것 같더라도 더욱 더 주님 안에서 강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마귀는 계속해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공격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사시기 전에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세가지로 유혹한다. 바로 “돌을 떡으로 되게 하라” 그리고 “성전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하라”, “자신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 이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 유혹들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부 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마: 4:7)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이때 싸움에서 패배한 마귀는 떠나갔다. 그 영적 싸움 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마태복음 4장 24절에 보면 마귀(루시퍼)의 졸개들인 귀신들도 패배하게 된다. 즉 마귀의 유혹인 세상의 영광, 과시욕 그리고 정욕들을 물리치면 그의 졸개 귀신들도 힘을 잃는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면 두 가지 유익이 있는데 그 하나는 그 전쟁을 통해서 더욱 더 성령의 사람으로 강해지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원수 사단이 패배하면서 한 도시에 살고 있는 수 많은 영혼들이 어둠에서 풀려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의 중요한 이유이다. 

마귀는 아직도 이 시대의 사람들의 세계관을 통해서 당신이 눈으로 볼 때 위대한 일을 해야만 당신이 사랑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 무장하라고 명령한다. 그 첫 번째 무기는 진리의 허리띠다. 진리를 취하지 않으면 영이 힘을 쓰지 못한다. 진리의 반대말이 거짓말인데 이것을 분별해 내는 것이 바로 진리인 것이다. 야고보서 2장 2-4절과 디모데전서 2장 9-10절에 보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차별하지 말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내면이 외적으로 그 사람의 인격을 판단한다면 스스로를 먼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음성, 즉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도록 성령님을 곁에 있게 하셨다. 성령님이 없이는 누릴 수도 필요를 얻을 수도 없다. 그런 의미로 성령님은 상속의 담보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받기에 충분한 담보가 없다. 그러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담보로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성령님을 담보로 주셨다. 그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신다. 

두 번째 무기는 의의 호심경이다. 사단은 사랑의 능력을 잘 알기에 집중적으로 심장을 향해서 공격한다. 생명의 근원이고 사랑의 시작인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서 흉패로 보호해야 한다. 이 흉패는 바로 예수님의 심장이다. 조건 없이 계산 없이 무조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을 줄 때 조심하라고 한다. 누가복음 14장 12-14절에 보면 예수님은 다시 받기 위해서 조건적이고 계산적으로 상대방에게 베푸는 것의 위험성을 강조하신 것이다. 이런 초대와 대접은 마지막에 하나님으로부터 상이 없다. 그러나 다시 되돌림 받지 못했거나 혹시 다시 되돌림 받는 베풂을 주었어도 계산 없이 순수하게 했다면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 하신다. 따라서 계산하지 않고 준 것에도 보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이 땅에서 보상 받아도 천국에서 다시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계산적인 사랑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이렇게 할 때 의의 흉패를 우리의 심장에 붙이는 것이다.

우리는 소망이 없어 보이는 겨울나무처럼 도저히 살수 없을 것 같고 변화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곤 한다. 그러나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다시 부활시키고 바꾸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무리 소망 없고 불가능한 상황이라도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부자 청년

마태복음 19:16-23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설교요약>
몽골에 마더스데이 카드를 보냈는데, 그 카드의 배경 이미지는 바로 몽골이었습니다. 하지만 몽골에서 카드를 받으신 분은 이 카드의 아름다운 이미지가 미국인 줄 알았습니다. 맨하튼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맨하탄에 거주하는 분들이 맨하탄 이미지에 감동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즉 본인들이 사는 지역과 환경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10년 전 미전도 지역이었던 몽골로 파송될 때 런던과 스페인과 같은 유럽이 선교사 필요 지역이 되버렸습니다. 100년 전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던 유럽이 지금은 미전도 지역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이 바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하는 지상 명령이며, 그 말씀 위에 예수님의 교회들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축복입니다. 선교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후진국에서 선교할 때 직면하는 문제가 바로 가난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세례를 받았어도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신앙을 버리고 떠나는 현지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고 축복을 받았지만 1~2년이 지나도 삶의 변화가 없고 오히려 지속되는 삶의 고통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을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에는 구호 단체를 통해 천문학적인 돈이 아프리카나 아시아로 보내지고 있는데도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요? 구호 물자는 현지인들에게 일시적 해결책은 되지만,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물질적인 구호는 현지인들이 가난을 극복하게 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가난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부족하고 없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의지가 부족해서 가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난의 원인은 바로 관계의 단절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그리고 이웃들과의 관계 단절로부터 기인합니다.

그럼 왜 이런 관계의 단절이 생기는걸까? 이것은 바로 정직하지도 근면 하지도 않고, 믿음도 없는 성품이 원인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스스로 신뢰할 수 있는 성품으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해야 합니다. 그러면 문화 및 사회적 구조와 나아가 나라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관계로부터 오는 우리의 나눔은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눔과 희생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와 공동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미국의 가장 큰 적은 바로 개인주의 입니다. 개인주의가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그 이유는 희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부자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9장 16-23절에 보면 영생을 얻기 위해 계명을 지킨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너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어라'하신 말씀을 거부합니다. 부자는 재물이 많다는 뜻인데 부자 청년은 아직도 스스로가 가난하다 생각해서 누군가에게 나누어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나눔을 거부한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사실 예수님의 눈에는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 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전 재산의 사분의 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삭개오와 예수님의 무덤을 제공한 아리마대 요셉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부자는 나누는 자입니다. 이것은 희생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교는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후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이 따르는 행위입니다. 지금도 미국은 전세계에서 제일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입니다. 이것이 미국을 지키는 힘이며 하나님이 이 미국을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맨하튼은 가장 복음화가 안된 지역입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분들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