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시간 속으로

누가복음 2:21-39
21 할례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22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39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설교요약>
예수 생후 8일에,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행하기 위해 헤롯 성전에 들어갔을 때 전혀 기대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그곳에는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과 안나라는 노인들이 있었다. 특히 그 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 이 당시 성전의 크기는 지금의 미식 축구장의 세 배 정도였으며, 제사장 7,200명, 레위인 9,600명이 성전에서 봉사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가늠할 수 조차 없을 정도의 방대한 성전 안,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시므온과 안나는 예수님을 처음으로 정확하게 알아봤다는 점이다. 그 일은 '성령의 감동'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분이 선택한 사람들을 아신다. 그리고 그들을 성령의 감동으로 인도하신다.

* 성령의 시간 속으로
성령은 그 분을 의지하며 살 때, 그 분이 원하는 시간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신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시간 속에 천국이 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쫓아 살아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쫓아 살아야 한다. 그 시간을 알려면 계속해서 성령님을 사모하고 그 분을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영으로 우리가 채워지길 소망해야 한다. 시므온과 안나의 공통점은 육신의 정욕대로 살던 사람들이 아닌 신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제사장 지파 출신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임에도 이들은 성전을 사랑했고, 성령의 인도를 사모하며 절제된 삶을 살았다. 시간을 아끼는 것은 내 뜻과 계획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그 뜻을 알려면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정욕적인 삶을 의미있고 가치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그것이 방탕한 삶인 것을 금방 인지하고 돌이키게 된다.

* 성령의 시간 안에 있는 증거들
1) 예수가 보인다 
시므온과 안나가 성령의 감동으로 그 분이 이끄시는 시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처음 만난 것은 예수님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한 사람들의 행색을 하고 있었음에도, 성령의 감동을 받으며 살았던 시므온과 안나는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있던 예수님을 놓치지 않았다. 사우스 다코타에서 만난 모든 아이들이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 살고 있는데도, 천사같은 아이를 그 가운데서 보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싸인이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임재하신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신다. 상황이 어렵고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예수님을 보고 있는가?

2) 나를 붙들고 계신 주님의 손이 보인다
복음서의 시므온과 안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짧게 언급되어 있다. 그럼에도 평생 이 한 순간을 위해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의 삶을 강한 성령으로 붙드셨고, 매순간순간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게 하셨다. 누가 보아도 눈에 띄지 않는 힘없고 화려하지 않는 사람들이였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성령에 붙들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종종 이 땅에 살면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상실한다. 상대적인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또한 상대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목적이 있어 하나님이 이 땅에 탄생하게 하신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대단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을 부어주신다. 이 땅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존재감의 상실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는가? 그것이 풀어지고 자유하게 되는 방법은 하나다. 성령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성령안으로 이끌리는 길
1) 매순간 선택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주셨다. 선택을 위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주셨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 만남, 생각, 그리고 장소에 있기를 매순간 선택할 때, 우리는 성령이 인도하시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2)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라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려운 사람들과의 관계로 연결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 사랑은 삶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안식에 우리의 마음이 다다를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한다. 당신은 성령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길 사모하는가? 매순간 성령을 따라 선택하라. 선행이나 사역이 아닌 사랑을 하라.

하나님을 보려면

요한1서 4:12-13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설교요약>
MMC 교회에서 11년째 사우스 다코타 선교를 갔는데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사랑과 선교팀 안에 있는 사랑을 깊이 알게 하시고 더 완벽해져야 하는지를 보게 하시는 선교였다. 오늘은 우리들 안에 있는 사랑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온전한 사랑으로 나아가고 확장하시는지를 선교 팀원들의 나눔을 통해서 보겠다. 

선교지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자, 선생님은 아이에게 계속 말을 듣지 않으면 상으로 줬던 스티커를 다시 떼어가겠다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이 말 한마디에 그 아이의 마음은 완전히 닫혀 버렸다. 선생님의 어떤 말과 행동으로도 달래지지 않던 그 아이는, 제비어라는 그 아이의 형이 그 아이의 옆구리를 친근하게 손가락으로 살포시 찌르자 이내 마음을 풀었다.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권위적인 선생님이 아니라 가족 같은 친근한 관심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아이 안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그 곳에는 또 평소에는 천진난만한 다섯 살짜리 가브리엘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의 눈빛이 바뀌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이 오면 윽박지르고 무력으로 저지해도, 성난 스무살 청년처럼 집기와 캐비닛을 부수고, 난폭하게 변화되며 본인의 머리를 주먹으로 치는 자해까지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사해도 아무 반응도 없던 친구였다. 근데 갑자기 Deli Queen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해서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더니 원래의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은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듣고 그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더 큰 능력임을 알게 하셨다. 진정한 사랑은 내가 얼마나 재능 있고 능력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에 있음을 알게 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어느 한 아이가 선생남한테 마약를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 아이는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마약 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사실 이 아이는 착하고 긴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아이였다. 그래서 선생님이 이 아이의 머리카락을 예쁘게 따주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겨울왕국의 엘사와 같이 예뻤다. 이 순간은 선생님이 이 아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윈터, 스톰 그리고 썬더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들이 있었는데, 오래 전부터 성경 학교에 참가했던 아이들이였다. 이 아이들을 데리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근데 16세 정도된 원터가 차 안에서 욕을 섞어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도착하였지만 다들 주문은 안하고 뒤에서 서성거리기만 했고, 데빈에게 케찹통을 찾아달라 부탁했는데 케첩통을 찾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런 아이스크림 가게에 온 적이 거의 없던 아이들이여서 이 곳이 낯설었던 것이다. 하지만 피도 안섞인 동생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주기 위해 자신들은 조금만 먹고,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 때 원터가 그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온 스무 살 정도의 청년과 길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청년은 원터 삼촌인 저스틴이였다. 그런 저스틴을Taco Night과 Korea Night에 초대했는데 응했다. 저스틴은 Taco Night에 방문해서 스킷에 나오는 주인공이 죄와 싸우는 모습이 마치 자기와 같다면서,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Divine Appointment 이라 고백했다. 나는 원터가 욕하는 것과 본인을 자해하는 것이 싫다고 삼촌인 저스틴에게 이야기했고, 네가 아이들의 삼촌과 형이 되어달라 부탁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온전한 사랑의 발자국을 보여주신다. 우리가 걸어간 발자국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선생님들이 이 아이들을 위해 울고, 사랑을 표현할 때 이 아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오엔 목사님의 손자인 마셀은 이전에는 건방지고 종종 비웃는 표정을 자주 보였던 아이였지만, 이번엔 아이들이 우상 숭배에 사용한 바비인형을 버리고, 우리 선교팀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는 길에 분명한 발자국을 남겨주시는 것을 보았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사건도 보여주시는데 10년 동안 터키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자매를 통해 부족했던 선교 헌금을 채워주시고, 사우스 타코다에서 1시간 거리 안에 있는 목사님과 선교 장로님을 연결해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발자국을 확인하고 위로 받는 사건이었다. 

사우스 다코타 아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이기적이고 부족한 사랑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보게 하셨다. 이런 모순투성이 사랑을 성령 하나님이 온전하게 하시고 서로를 사랑하게 하신다. 이런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때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온전케 한다. MMC 선교팀의 모든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우는 모습 속에서 감동하게 하셨다. 우리는 사역을 잘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단지 이 아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께서 이 아이들이 온전한 사랑을 보게 하시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을 온전하게 하는 방법이다.

땅에서 누리는 평안

누가복음 2:1-20
1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설교 요약>
누가복음 2:1-20은 성탄절 설교에서 주로 많이 인용되는 성경 구절이다. 예수님의 탄생이 역사적 사실임을 명확히 증거하기 때문이다. 로마는 당시 식민 통치하던 속국의 인구 조사를 통한 세금 및 병역 징집의 이익을 챙겼다.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으로 유다 지파였다. 때문에 요셉은 자신의 약혼녀 마리아를 데리고 나사렛으로부터 다윗의 출생지 베들레헴으로 호적 신고를 하러 올라갔다. 베들레헴에 머무는 동안 마리아의 해산일이 임박하여 예수님을 낳았고, 여관에 남는 방이 없어 예수님을 강보에 싸서 말 구유에 뉘였다. 이 지점에서 ‘왜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아구스도)는 예수님 탄생 시점에 호적 신고를 명했을까?’  ‘예수님은 꼭 베들레헴 에서 탄생하셨어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
구약에 미가 선지자는 주전 약 735-700년 경에 예수님 탄생에 대해 예언했다(미가:5:2) 동방박사들은 큰 별을 따라 다다른 곳에서, 그 곳의 왕 헤롯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계신지 물었다. 헤롯은 구약 율법의 선생들이자 전문가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나는지 물었다. 그들은 정확하게 미가서 5장 2절을 인용하며 베들레헴이라 답했다(마 2:5-6) 서기관과 대제사장은 지식적으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나,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누위신 예수님을 찾지도, 예배하지도 않았다. 이것을 안 헤롯은 군사를 보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헤롯의 이런 광기 어린 살육은 아기 예수님이 자신의 권좌에 위협이 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오시면 진심이 드러난다(마 10:26) 감추어진 명예욕과 탐욕이 드러난다. 실천 없는, 말뿐인 믿음과 헌신이 드러난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많은데 정작 하나님은 모른다. 반면 이런 전문가들처럼 구약 성경을 모르던 한밤의 양치는 목자들은 천사의 방문을 받았다. 천사는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고 전해주었다.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알려주었다. 학식도, 부도, 명예도 없없지만, 목자들은 단순하고 순수했다. 그들은 천사를 통해 기쁜 소식을 듣고 아기 예수를 찾으러 가자 서로 말했다(눅 2:15-16)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헤롯과 종교 지도자들에게로 먼저 보낸 점이다. 헤롯은 자기의 두 딸과 아내를 죽였으며, 자신의 삶의 마지막 즈음엔, 자신에게 충성했던 신하들을 여리고 감옥으로 보낸 잔인한 사람이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 했지만 사실 위선적 삶을 살았고, 끝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에게 동방박사들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셨다. 하나님은 먼저 동방박사들을 통해 그들의 완악하고 위선적인 마음을 두드리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서도 거절했다.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도 천사를 만났지만, 천사 같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도 죄인이었다. 그날 저녁 목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께 무릎 꿇고 경배드렸다(눅 2:20)

죄인들에게 주시는 은혜
오늘도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사람도 보내시고, 천사도 보내신다.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천사들이, 가장 초라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광야에서 밤을 지새우는 목자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의 금가루를 뿌려주거나, 대단한 보석을 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었다. 그 분을 어떻게 만나는지 알려주었다. 오늘날에도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알려주고 어떻게 그 분을 만날수 있는지 알려주는 이가 바로 천사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만족과 평안을 찾아 헤메이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 안에 있다.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면서 하늘의 영광과 평화를 말했다.(눅 2:14) 평화는 'Peace'는 평안, '땅에서 평안' 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땅에서의 평안을 얻기를 갈망하며 크게 세 가지를 추구한다. 편리한 삶, 인간 관계, 욕구 충족이다. 넓고 안락하고 깨끗한 공간은 더럽고 불편한 공간보다 마음을 한층 평안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런 외적 좋은 환경들이 지속적 평안을 보장하진 못한다. 내면에 채워지지 않는 어떤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한 평안을 위해 좋은 인간 관계를 추구한다. 인간이라면 관계를 통해 오는 관심과 배려로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누군가를 돌보면서도 내면에는 더 많은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또한 누구보다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아도 우울하고 권태를 느끼며, 만족 없이 다른 새로운 것에 탐닉하는 사람들도 많다. 식욕처럼 본능적 욕구가 충족되면 어느 정도의 기쁨과 만족이 있다. 새로운 것을 아는 것, 성취에 대한 즐거움도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평안을 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시시하고 허무해진다. 따라서 편리한 삶, 완벽한 인간관계, 본능적 욕구 충족이 어느 정도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줄 순 있어도, 내면에 근본적으로 갈망하는 평안과 만족은 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영혼에 근본적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는 건 오직 예수뿐이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 했다. '기뻐하신 사람들' 은 헬라어로 '은총을 입다' 란 의미다. 당신은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 만약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 분을 위해 살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면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그 은혜를 받아 드리면 평안이 임한다.

전쟁 중에도 누리게 되는 평안
누군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에 대해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많은 영적 싸움에 직면하게 괴고 마귀의 공격 표적이 된다 했는데 어떻게 전쟁 중에 평안을 누릴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실때 예수님은 유월절 저녁 체포직전이었다. 사단이 예수님을 죽이려 총공격을 퍼부을 때였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평안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인이 용서함을 받고 새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다 환난을 만나기도 하고, 사단의 맹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영적 전쟁 속에서도 땅에서 누리는 평안이 있다. 당신의 삶이 영적 전쟁 안에 있는가? 환란이 있는가? 그러면 반드시 하늘의 평안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전쟁 중에도 평안을 누릴수 있다. 그래서 영적 싸움이나  주님 주시는 환란을 포기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또한 평안을 누리기 위해 한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목자들처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야한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그 분의 임재 안에 있는 안식을 더 누릴수 있다.

풀어짐

요한복음 11:37-44
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설교요약>
나사로는 죽은 지 사흘이 지나 다시 살아났다. 예수님이 무덤 밖에서 나사로를 살아나오라 불러내셨을 때, 그를 장사 시 수족에 동였던 베와 수건이 얼굴에 싸여진 채로 무덤으로부터 걸어나왔다. 이 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일러 수건과 베로 싸인 그의 몸을 풀어놓아 주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살아났지만, 어떤 것에 묶여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사람은 내면에도 양면성이 있다. 선하고 평안해 보이지만, 한편  활화산처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내면의 볼케이노는 풀어짐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를 풀어주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풀어줄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는 기도로 풀어주라
아합왕과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와 죄악으로 하나님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셨다(약 5:17). 그러나 3년 6개월이 지나 엘리야에게 비를 약속하셨다. 약속을 받았음에도 엘리야는 비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비 올 기미는 0%도 없었다. 왜 하나님은 비를 약속하시고도 엘리야가 7번 기도하게 하시고, 7번째 마저도 비 대신 손바닥만한 구름만 보여 주셨을까? 이 일로 크게 세 가지가 풀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엘리야의 겸손이 풀어졌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우상 숭배하는 제사장 850명을 모았다. 그리고 바알의 제단을 쌓게 하고 그들의 신에게 구하게 했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엘리야도 자신의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간구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내린 불이 제단 나무, 제물 및 도랑물까지 모두 태웠다. 이것을 본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외쳤다. 그는 한 순간에 하나님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그 후 기도하는 것이 쉽게 응답받지 못하자, 그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고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 기도해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 내면에 겸손이 풀어지길 원하신다.

둘째. 사환의 긍정적 눈이 풀어졌다. 
엘리야가 사환에게 바다를 바라보라 할 때, 사환은 아무것도 없다고 보고했다. 엘리야가 이른 대로 일곱번을 확인하러 가면서 사환은 포기하지 않는 엘리야의 믿음을 보았다. 그리고 일곱번째도 빗방울이 아니라 손바닥만한 구름 조각 하나만 보았다. 측량 불가능하고 무한한 하늘에서 손바닥만한 구름을 본 사환의 눈은 믿음의 눈이었다. 엘리야는 그 작은 구름을 보고 아합에게 비에 막하지 않게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라 선포했다. 상황이 좋을 때는 누구나 긍정적이고 기뻐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안좋으면  부정의 심리도 드러난다. 사환은 부정적 상황에서 엘리야의 큰 소망과 포기하지 않는 긍정적 믿음과 기도를 보았다. 믿음의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낳는다. 이 때 이 것을 본 두려움에 쌓인 부정적인 주변 사람들의 소망이 내면에서 풀어지기 시작한다. 소망은 소망을 낳는다.

셋째. 선포가 풀어졌다
엘리야는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고 아합 왕에게 큰 비가 올 것처럼 미리 선포했다. 하나님은 손바닥만한 구름을 통해 엘리야로 담대히 선포하도록 풀어놓으셨다. 그리고 그 선포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주시는 단어를 붙들고 기도하라. 성령의 감동을 붙들고 선포하며 기도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선포한대로 행하신다.
예수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믿음으로 준비하고 행동하길 원하신다. 부족함과 불가능과 부정적 상황 속에서 겸손이 풀어지고, 부정적인 사람들 내면에 소망과 긍정이 풀어지고 선포가 풀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바다 같은 아름다움도 있지만, 분출하는 용암과 같은 분노도 있고 아픔도 있다. 어떤 용암은 조용히 바다로 흘러들어 육지를 만들 듯 그 삶의 지경을 넓힌다. 반면 어떤 용암은 땅을 뒤덮고 파괴하듯, 분노로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스스로의 삶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어떻게 풀어지는가의 차이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분노가 풀어질 때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기회가 된다.

하나님은 오늘도 부족함과 위기의 부정적 상황을 통해 많은 것을 풀으신다. 당신이 처한 부정적 상황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받고자  하시는 당신의 태도와 믿음과 행동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번 사우스 다코타 선교를 통해 풀어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푸시고 계신가?

차고 넘치는 행복

요한일서 4:7-12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설교 요약>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하버드대 로버트 왈딩거 박사팀의 75년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결코 부와 명예 또는 노력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성취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건 “좋은 관계’라는 사실이 그들이 발견한 가장 분명한 메세지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일보다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런 결과가 사실 조금도 놀랍지 않다. 하지만 왜 우리는 부와 명예를 위해 열심히 살면 행복해질거라는 허망한 거짓에 반복적으로 속으며 계속해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고 있을까?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시간들을 아깝게 여기고, 더 많이 벌고, 더 높은 자리로 오르는 것을 위해 우리들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걸까? 이유는 ‘죄’ 때문이라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죄가 우리에게 들어와 저지른 일이 사람간의 관계를 깨트리는 일이었다. 사람들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죄로 인해 깨어졌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깨졌고, 그 영향으로 인간 사이의 관계도 깨진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와 해결방법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바로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행복과 건강은 로버트 왈딩거 박사팀의 연구 결과처럼 우리가 맺는 '관계'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설 때에만 가능하다. 하나님과 화목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두둔하거나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행위를 극히 혐오하신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법을 바꾸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 일을 행하셨다. 악인을 의롭다 하시고, 의인을 악인으로 재판에 넘기시어 형벌과 죽음의 고통을 겪게 하셨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한 인간이 모든 인류의 가치를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이 자식처럼 지으셔서 함께 그 분의 피조물들을 관리하게 한 아담의 가치를 대신할 피조물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 아담의 모든 자손들을 다 합친 가치를 가진 존재는 창조주 하나님밖에는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두 가지 자격을 가진 유일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바르게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것이다. 단지 갈등이 없는 평화와 평안의 상태가 아니라 행복을 동시에 의미하는 화목제물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신 방법이라 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로마서 5:8

헷세드_상대방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
헷세드는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방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화목제물을 통해 죄를 짓기 전 아담의 신분과 권세를 회복했다. 이제 법적으로 신분이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관계 속에서 진정한 화목을 이루었는가? 한 집에서 최소 몇 시간을 함께 보내는 가족이 일주일에 단 몇 분 정도만 대화를 한다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화목하다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지 못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서운한 점이 있는가? 하나님이 두려운가? 어떤 계기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하게 되었을까? 기대하지 않는 마음, 마음을 터놓지 않은 태도가 그 분과의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하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 삶에 어렵고 힘든 문제를 허락하실 때가 있다. 그런 때에 하나님께 서운하고, 원망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혹시 그 계기로 인해 하나님께 등 돌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삶에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어려움을 허락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는데 그런 때에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그 분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동일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레미야 29:11

여러분 중에 혹시 어떤 시련의 기억 때문에, 응답되지 않은 기도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이제는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길 바란다. 예수님을 만나고 풀어진 관계는 셀 수 없이 많다. 진정한 화목은 하나님과 먼저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함축적이고 분명한 계명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해야 이웃과도 화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