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세례

누가복음 3:1-6
1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설교요약>
하나님은 오늘도 삐뚫어지고 뒤틀린 영혼이 반듯하게 변화되는 것에 관심이 많으시다. 그럼 하나님이 어떤 것들을 바로잡기 원하시는지 그 유형들의 문제점과 바로잡는 방법들을 생각해 보자.

첫번째 골짜기 형이 있다.
사람의 내면도 골짜기형이있다. 내면이 너무 많이 패여서 관계를 가질수록 자신의 살도 패여져가는 아픔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골짜기형 사람들에게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사람을 회피하는 것과 사람에게 공격적인 성향 둘다이다. 다섯 명의 남편과 헤어지고 여섯번 째 남자와 살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을 보자. 그녀는 중동에서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 정오에 물을 길러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녀에게 물 좀 달라고 하자 유대인이 왜 사마리아 사람에게 물을 달라고 하냐고공격적으로 반응했다. 내면에 골이 깊이 패인 사람은 늘 사람들을 회피하거나 공격적인 성향을 쉽게 나타난다. 그러나 누가복음 7장에 나타난 여인의 내면에 파인 골짜기는 이미 예수님의 사랑으로 메꾸어져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증거는 이 여인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럴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는 사람이 아닌 예수님을 바라보고 집중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의식할수록 사람들이 두려워지고 적대감이 커진다. 그러나 예수님을 집중하면 사람들이 두려워지지 않고 적대감이 줄어든다. 그 때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생명을 줄 수 있다. 이 여인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정죄와 평가에 집중하지 않고 예수님께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직장, 가정, 교회, 학교에서 순간순간 사람이 두려워질 때가 있다. 그 때마다 그 덫에서 나와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고 고약한 냄새들로 가득찬 장소들을 향기로운 향기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열쇠는 사람이 아닌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 내면의 골짜기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분의 새살로 채우고 싶어하심을 아는가? 사람이 아닌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을바라보는가? 사람이 아닌 예수님의 사랑을 주목할 때 당신의 내면에 깊게 파인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게 될 것이다. 그 골짜기가 메워지면 당신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두번째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통해 보여 주신 유형은 높은 산과 작은 산이다.
하나님은 이런 산을 낮아지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누가복음 3:5 말씀에 동사 '낮아지고'는 '겸손하게 하다' '낮아지게 하다' 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들이 낮아져서 겸손한 삶을 사는 것에 관심이 많으시다. 사랑받는 것과 추앙받으려는 것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사랑받으려 하는 것은 겸손이고 추앙받으려 하는 것은 교만이다. 하와를 유혹한 사단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그 것을 먹지 못하게 한 것은 인간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될 것을 경계한 것이라고 했다. 사단의 말을 듣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 행위의 동기 속에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능가하고 조종하려는 심리를 보게 된다. 교만의 뿌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섭다. 교만은 인간이 신이되려 하는 것이다. 높은 지위나 지식이나 세상의 부를 가졌을 때 교만은 수면 위로 정체를 드러내는 빙산과 같다. 사람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행복해 한다. 그러나 사람을 신처럼 추앙하라고 강요받거나 아부를 하게 되면 큰 수치감을 느끼고 자존감을 훼손 당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내면에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추앙하는 본능을 넣어주셨기 때문이 다. 세상에 부와 권력을 잡은 자들 중에 높은 산이 될수록 더욱 낮아지는사람들이 있다. 세상은그리스도인이 완벽해서 그리스도께 이끌리는 것이 아니다. 솔직하고 진실할 때 그 겸손한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린다. 그럼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가? 살지 않는가?의 기준은 무엇일까?

믿음의 기준 3가지
첫째. 영혼의 부흥을 위해 기도한다.
하박국 2:2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 그 분의 심판을 알고 그 분의 은혜를 알고 영광을 인정하면 할수록 그런 사람들의 영혼은 이 땅에 부흥이 임하길 소원한다. 사람들의 영혼이 '부흥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기 시작한다. 한 영혼이 다시 새롭게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게 되길 소원한다. 무릎 꿇고 열방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열정을 갖게 된다.
둘째. 결핍과 풍요 속에서도 주를 기뻐한다.
하박국 3:17-18 말씀에 따르면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증거는 아니다. 없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계기가 되었다. 없는 것이 오히려 영적으로 거룩하고 겸비하여 깨어있게 했다. 없는 것이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감사로 기쁨으로 인도했다. 당신의 부족함은 무엇인가? 결핍 속에서 오는 불안과 걱정은 무엇인가? 당신이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은 기쁨을 주실 것이다. 기쁨과 함께 응답도 주실 것이다.
셋째. 사슴의 발 같은 힘을 주실것을 기대한다.
하박국 3-19 말씀에 따르면 하박국은 처음에는 불만과 원망을 하나님께 토로했다. 그러나 하박국은 하나님이 자신의 발을 사슴의 발 같이 해주실 거라 확신했다.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사슴 발 같은 힘을 주신다. 회개는 골짜기를 채우는 것이다. 회개는 높아진 산과 같은 마음을 겸손히 낮추는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들에게 이런 축복을 약속하셨다. 요엘 2:12-14 말씀에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모든 것을 돌이키신다. 저주가 축복이 되게하신다. 재앙을 중단 시키실 수 있다. 하나님은 마음을 찢으며 애통하며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회개는 하늘문을 여는 열쇠다. 회개는 내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준비된 사과

누가복음 2:40-52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설교요약>                                                                                                                                                  열두살이 된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잃어버렸음을 알아차리고, 하룻밤길을 되돌아가 삼 일이 지난 후에야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게 된다. 
본문에서는 열 살 미만인 아이의 외적 성장과 열 두 살 이후 예수님의 사랑스러운 내적 성장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현대의 부모들은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자녀들을 교육하고 보살핀다. 그 결과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는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겉모습만 강한 모습으로 성장했을 뿐, 내면은 두려움으로 가득찬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즉, 주변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 행동을 하면서도 전혀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로 자란 것이다. 지식과 외형은 자랐지만 성품과 인성은 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성인 아이  
기독교 상담학자 Dr. Archibald D. Hart는 자신의 저서에서 어린 시절 심각한 애정 결핍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정서 장애를 보이는 사람들의 세 가지 증상을 적고 있다.
첫째. 사랑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의 사람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과도하게 노력하며, 끊임 없이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비현실적으로 높인다. 
둘째. 인격에 깊이 새겨져 있는 심각한 특정 성격의 발달이 나타난다. 
과도한 질투와 함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강한 욕구와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동시에 나타낸다. 깊은 불안감으로 인해 사랑을 늘 재확인 받으려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높다. 
셋째. 애정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나 질병이 발생한다.
'내가 아프기 때문에,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이젠 나를 사랑해야만 해'라며 주로 동정을 통해 사랑을 획득한다. 어린 시절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잘 받고 자라는 것만으로도, 이후 사회적 실패나 신체적, 지적 결함까지도 이겨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외적으로는 성인인데 내면은 여전히 어린 아이들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진실로 오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서도, 왠지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두려워서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만, 늘 하나님이 두렵고 부담스럽다. 늘 사랑에 목말라 사람들 주변을 맴돌며 전전긍긍하고, 과도한 질투와 주목 받거자 하거나, 집착적 성향을 보임으로 인해 타인과의 지속적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아버지 집을 사모하라  
예수님의 부모는 매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온 가족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만큼 신실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날이다. 요셉과 마리아는12년 전에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했고, 여러 기적을 통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의심 없이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님을 그저 자신들의 자녀 중에 하나이자, 인간의 아들로 점점 인식해 갔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에 머물면서 '내가 내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머무는 것에 대한 당연한 말을 했을 때, 그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할 만큼 영혼이 둔감해지고 세상적인 사람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의무는 다하고 있었지만 진정한 사랑과 영적인 영향력은 희미해져 갔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잃어 버리면 교회는 사회적인 활동 무대로 전락한다. 자녀들을 세상적인 것들로만 키우려 한다. 오늘날의 자녀들이 점점 세상의 쾌락과 정욕에 빠져드는 것은 그들이 영혼의 '아버지 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모들은 자녀들의 영혼이 갈망하는 아버지 집으로 데려와, 그 곳에 머물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사춘기 시절의 아이는 자신이 사랑스럽지 않은 것으로 인해 갈등을 겪고, 그래서 타인들과더 거리를 두고, 상태가 심해지면 사람들을 미워하게 된다. 이러한 마음과 생각은 오직 하나님만이 치유하고 채울 수 있는 영역이다. 아버지 집을 잃고 예수님을 잃으면 아무리 종교적인 의무를 다해도 내면은 채워지지 않는다. 자녀의 영혼에 생명의 양식을 주는 아버지의 집으로 교회를 보로,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영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깨어 있는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아버지 집을 사모하는 영혼들이 일어나길 간절히 찾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먼저 하는 사랑
52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했고 그 분의 사랑을 갈구했다. 그래서 그 결과 사람들에게도 사랑스러운 분이 되어 가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 하나가 되어 사랑을 주고 받았다. 그 사랑 받음의 확인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확장 되어가고 세상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 거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매순간 확인하고 확신하는 사람은 그 사랑이 사람들에게 흘러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는데도 계속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 교만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성숙한 사랑, 건강한 사랑은 먼저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시 돌려받는 사랑은 1) 우리 자신을 더욱 겸손하게 해준다.  2) 하나님이 우리 같은 죄인을 먼저 사랑하셔서 그분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 사랑의 마음을 알게 된다. 3) 먼저 주는 사랑의 기쁨과 성숙을 맛보았기에 더욱 누군가를 먼저 사랑하는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해준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은 먼저 하는 사랑으로 드러난다. 

결국 성인 아이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사랑의 깊이에 비례한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지옥 형벌을 받도록 내주신 것은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최고의 사랑이다. 때로 이 사랑을 알게 하시기 위해 자연을 통해 다시 우리의 영혼을 상기시키기도 하신다. 아버지 하나님을 의무적으로 형식적으로 사랑하지 마라. 마음으로, 영으로, 아버지 집 교회를 사랑하라. 그 사랑으로 헌신하라. 먼저 사랑하라.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라.

성령의 시간 속으로

누가복음 2:21-39
21 할례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22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39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설교요약>
예수 생후 8일에,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행하기 위해 헤롯 성전에 들어갔을 때 전혀 기대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그곳에는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과 안나라는 노인들이 있었다. 특히 그 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 이 당시 성전의 크기는 지금의 미식 축구장의 세 배 정도였으며, 제사장 7,200명, 레위인 9,600명이 성전에서 봉사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가늠할 수 조차 없을 정도의 방대한 성전 안,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시므온과 안나는 예수님을 처음으로 정확하게 알아봤다는 점이다. 그 일은 '성령의 감동'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분이 선택한 사람들을 아신다. 그리고 그들을 성령의 감동으로 인도하신다.

* 성령의 시간 속으로
성령은 그 분을 의지하며 살 때, 그 분이 원하는 시간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신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시간 속에 천국이 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쫓아 살아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쫓아 살아야 한다. 그 시간을 알려면 계속해서 성령님을 사모하고 그 분을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영으로 우리가 채워지길 소망해야 한다. 시므온과 안나의 공통점은 육신의 정욕대로 살던 사람들이 아닌 신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제사장 지파 출신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임에도 이들은 성전을 사랑했고, 성령의 인도를 사모하며 절제된 삶을 살았다. 시간을 아끼는 것은 내 뜻과 계획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그 뜻을 알려면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정욕적인 삶을 의미있고 가치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그것이 방탕한 삶인 것을 금방 인지하고 돌이키게 된다.

* 성령의 시간 안에 있는 증거들
1) 예수가 보인다 
시므온과 안나가 성령의 감동으로 그 분이 이끄시는 시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처음 만난 것은 예수님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한 사람들의 행색을 하고 있었음에도, 성령의 감동을 받으며 살았던 시므온과 안나는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있던 예수님을 놓치지 않았다. 사우스 다코타에서 만난 모든 아이들이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 살고 있는데도, 천사같은 아이를 그 가운데서 보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싸인이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임재하신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신다. 상황이 어렵고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예수님을 보고 있는가?

2) 나를 붙들고 계신 주님의 손이 보인다
복음서의 시므온과 안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짧게 언급되어 있다. 그럼에도 평생 이 한 순간을 위해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의 삶을 강한 성령으로 붙드셨고, 매순간순간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게 하셨다. 누가 보아도 눈에 띄지 않는 힘없고 화려하지 않는 사람들이였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성령에 붙들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종종 이 땅에 살면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상실한다. 상대적인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또한 상대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목적이 있어 하나님이 이 땅에 탄생하게 하신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대단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을 부어주신다. 이 땅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존재감의 상실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는가? 그것이 풀어지고 자유하게 되는 방법은 하나다. 성령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성령안으로 이끌리는 길
1) 매순간 선택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주셨다. 선택을 위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주셨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 만남, 생각, 그리고 장소에 있기를 매순간 선택할 때, 우리는 성령이 인도하시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2)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라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려운 사람들과의 관계로 연결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 사랑은 삶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안식에 우리의 마음이 다다를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한다. 당신은 성령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길 사모하는가? 매순간 성령을 따라 선택하라. 선행이나 사역이 아닌 사랑을 하라.

하나님을 보려면

요한1서 4:12-13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설교요약>
MMC 교회에서 11년째 사우스 다코타 선교를 갔는데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사랑과 선교팀 안에 있는 사랑을 깊이 알게 하시고 더 완벽해져야 하는지를 보게 하시는 선교였다. 오늘은 우리들 안에 있는 사랑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온전한 사랑으로 나아가고 확장하시는지를 선교 팀원들의 나눔을 통해서 보겠다. 

선교지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자, 선생님은 아이에게 계속 말을 듣지 않으면 상으로 줬던 스티커를 다시 떼어가겠다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이 말 한마디에 그 아이의 마음은 완전히 닫혀 버렸다. 선생님의 어떤 말과 행동으로도 달래지지 않던 그 아이는, 제비어라는 그 아이의 형이 그 아이의 옆구리를 친근하게 손가락으로 살포시 찌르자 이내 마음을 풀었다.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권위적인 선생님이 아니라 가족 같은 친근한 관심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아이 안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그 곳에는 또 평소에는 천진난만한 다섯 살짜리 가브리엘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의 눈빛이 바뀌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이 오면 윽박지르고 무력으로 저지해도, 성난 스무살 청년처럼 집기와 캐비닛을 부수고, 난폭하게 변화되며 본인의 머리를 주먹으로 치는 자해까지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사해도 아무 반응도 없던 친구였다. 근데 갑자기 Deli Queen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해서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더니 원래의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은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듣고 그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더 큰 능력임을 알게 하셨다. 진정한 사랑은 내가 얼마나 재능 있고 능력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에 있음을 알게 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어느 한 아이가 선생남한테 마약를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 아이는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마약 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사실 이 아이는 착하고 긴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아이였다. 그래서 선생님이 이 아이의 머리카락을 예쁘게 따주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겨울왕국의 엘사와 같이 예뻤다. 이 순간은 선생님이 이 아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윈터, 스톰 그리고 썬더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들이 있었는데, 오래 전부터 성경 학교에 참가했던 아이들이였다. 이 아이들을 데리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근데 16세 정도된 원터가 차 안에서 욕을 섞어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도착하였지만 다들 주문은 안하고 뒤에서 서성거리기만 했고, 데빈에게 케찹통을 찾아달라 부탁했는데 케첩통을 찾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런 아이스크림 가게에 온 적이 거의 없던 아이들이여서 이 곳이 낯설었던 것이다. 하지만 피도 안섞인 동생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주기 위해 자신들은 조금만 먹고,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 때 원터가 그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온 스무 살 정도의 청년과 길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청년은 원터 삼촌인 저스틴이였다. 그런 저스틴을Taco Night과 Korea Night에 초대했는데 응했다. 저스틴은 Taco Night에 방문해서 스킷에 나오는 주인공이 죄와 싸우는 모습이 마치 자기와 같다면서,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Divine Appointment 이라 고백했다. 나는 원터가 욕하는 것과 본인을 자해하는 것이 싫다고 삼촌인 저스틴에게 이야기했고, 네가 아이들의 삼촌과 형이 되어달라 부탁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온전한 사랑의 발자국을 보여주신다. 우리가 걸어간 발자국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선생님들이 이 아이들을 위해 울고, 사랑을 표현할 때 이 아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오엔 목사님의 손자인 마셀은 이전에는 건방지고 종종 비웃는 표정을 자주 보였던 아이였지만, 이번엔 아이들이 우상 숭배에 사용한 바비인형을 버리고, 우리 선교팀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는 길에 분명한 발자국을 남겨주시는 것을 보았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사건도 보여주시는데 10년 동안 터키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자매를 통해 부족했던 선교 헌금을 채워주시고, 사우스 타코다에서 1시간 거리 안에 있는 목사님과 선교 장로님을 연결해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발자국을 확인하고 위로 받는 사건이었다. 

사우스 다코타 아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이기적이고 부족한 사랑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보게 하셨다. 이런 모순투성이 사랑을 성령 하나님이 온전하게 하시고 서로를 사랑하게 하신다. 이런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때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온전케 한다. MMC 선교팀의 모든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우는 모습 속에서 감동하게 하셨다. 우리는 사역을 잘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단지 이 아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께서 이 아이들이 온전한 사랑을 보게 하시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을 온전하게 하는 방법이다.

땅에서 누리는 평안

누가복음 2:1-20
1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설교 요약>
누가복음 2:1-20은 성탄절 설교에서 주로 많이 인용되는 성경 구절이다. 예수님의 탄생이 역사적 사실임을 명확히 증거하기 때문이다. 로마는 당시 식민 통치하던 속국의 인구 조사를 통한 세금 및 병역 징집의 이익을 챙겼다.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으로 유다 지파였다. 때문에 요셉은 자신의 약혼녀 마리아를 데리고 나사렛으로부터 다윗의 출생지 베들레헴으로 호적 신고를 하러 올라갔다. 베들레헴에 머무는 동안 마리아의 해산일이 임박하여 예수님을 낳았고, 여관에 남는 방이 없어 예수님을 강보에 싸서 말 구유에 뉘였다. 이 지점에서 ‘왜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아구스도)는 예수님 탄생 시점에 호적 신고를 명했을까?’  ‘예수님은 꼭 베들레헴 에서 탄생하셨어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
구약에 미가 선지자는 주전 약 735-700년 경에 예수님 탄생에 대해 예언했다(미가:5:2) 동방박사들은 큰 별을 따라 다다른 곳에서, 그 곳의 왕 헤롯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계신지 물었다. 헤롯은 구약 율법의 선생들이자 전문가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나는지 물었다. 그들은 정확하게 미가서 5장 2절을 인용하며 베들레헴이라 답했다(마 2:5-6) 서기관과 대제사장은 지식적으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나,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누위신 예수님을 찾지도, 예배하지도 않았다. 이것을 안 헤롯은 군사를 보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헤롯의 이런 광기 어린 살육은 아기 예수님이 자신의 권좌에 위협이 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오시면 진심이 드러난다(마 10:26) 감추어진 명예욕과 탐욕이 드러난다. 실천 없는, 말뿐인 믿음과 헌신이 드러난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많은데 정작 하나님은 모른다. 반면 이런 전문가들처럼 구약 성경을 모르던 한밤의 양치는 목자들은 천사의 방문을 받았다. 천사는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고 전해주었다.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알려주었다. 학식도, 부도, 명예도 없없지만, 목자들은 단순하고 순수했다. 그들은 천사를 통해 기쁜 소식을 듣고 아기 예수를 찾으러 가자 서로 말했다(눅 2:15-16)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헤롯과 종교 지도자들에게로 먼저 보낸 점이다. 헤롯은 자기의 두 딸과 아내를 죽였으며, 자신의 삶의 마지막 즈음엔, 자신에게 충성했던 신하들을 여리고 감옥으로 보낸 잔인한 사람이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 했지만 사실 위선적 삶을 살았고, 끝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에게 동방박사들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셨다. 하나님은 먼저 동방박사들을 통해 그들의 완악하고 위선적인 마음을 두드리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서도 거절했다.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도 천사를 만났지만, 천사 같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도 죄인이었다. 그날 저녁 목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께 무릎 꿇고 경배드렸다(눅 2:20)

죄인들에게 주시는 은혜
오늘도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사람도 보내시고, 천사도 보내신다.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천사들이, 가장 초라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광야에서 밤을 지새우는 목자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의 금가루를 뿌려주거나, 대단한 보석을 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었다. 그 분을 어떻게 만나는지 알려주었다. 오늘날에도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알려주고 어떻게 그 분을 만날수 있는지 알려주는 이가 바로 천사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만족과 평안을 찾아 헤메이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 안에 있다.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면서 하늘의 영광과 평화를 말했다.(눅 2:14) 평화는 'Peace'는 평안, '땅에서 평안' 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땅에서의 평안을 얻기를 갈망하며 크게 세 가지를 추구한다. 편리한 삶, 인간 관계, 욕구 충족이다. 넓고 안락하고 깨끗한 공간은 더럽고 불편한 공간보다 마음을 한층 평안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런 외적 좋은 환경들이 지속적 평안을 보장하진 못한다. 내면에 채워지지 않는 어떤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한 평안을 위해 좋은 인간 관계를 추구한다. 인간이라면 관계를 통해 오는 관심과 배려로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누군가를 돌보면서도 내면에는 더 많은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또한 누구보다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아도 우울하고 권태를 느끼며, 만족 없이 다른 새로운 것에 탐닉하는 사람들도 많다. 식욕처럼 본능적 욕구가 충족되면 어느 정도의 기쁨과 만족이 있다. 새로운 것을 아는 것, 성취에 대한 즐거움도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평안을 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시시하고 허무해진다. 따라서 편리한 삶, 완벽한 인간관계, 본능적 욕구 충족이 어느 정도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줄 순 있어도, 내면에 근본적으로 갈망하는 평안과 만족은 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영혼에 근본적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는 건 오직 예수뿐이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 했다. '기뻐하신 사람들' 은 헬라어로 '은총을 입다' 란 의미다. 당신은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 만약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 분을 위해 살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면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그 은혜를 받아 드리면 평안이 임한다.

전쟁 중에도 누리게 되는 평안
누군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에 대해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많은 영적 싸움에 직면하게 괴고 마귀의 공격 표적이 된다 했는데 어떻게 전쟁 중에 평안을 누릴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실때 예수님은 유월절 저녁 체포직전이었다. 사단이 예수님을 죽이려 총공격을 퍼부을 때였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평안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인이 용서함을 받고 새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다 환난을 만나기도 하고, 사단의 맹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영적 전쟁 속에서도 땅에서 누리는 평안이 있다. 당신의 삶이 영적 전쟁 안에 있는가? 환란이 있는가? 그러면 반드시 하늘의 평안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전쟁 중에도 평안을 누릴수 있다. 그래서 영적 싸움이나  주님 주시는 환란을 포기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또한 평안을 누리기 위해 한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목자들처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야한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그 분의 임재 안에 있는 안식을 더 누릴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