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가 무거울수록

누가복음 6:20-49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설교요약>


3단계의 사랑 중 1단계는 하나님에 대해 갈급한 영혼들이다. 20-22절에 보면 예수님은 영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목말라하고 갈망하는 영혼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채워짐과 하늘의 기쁨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2단계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목말라하는 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핍박과 어려움을 격은 단계를 의미한다. 3단계는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 세 단계를 정리해보면 1단계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2단계는 나와 나와의 관계, 3단계는 나와 원수와의 관계이다. 이 단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럼 당신은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가?

이 불가능한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3가지 방법들이 있다. 첫째는 자책감을 주려 함이 아니라 자책과 결별하게 하기 위함이다. 35절에 보면 “기대하지 말라” 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누군가가 내 공로를 인정해 주고 고마워 할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37절에 보면 “용서해라” 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자신의 죄성에 대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이 자신을 용서하고 타인들을 용서하는 삶을 살게 된다. 38절에 보면 “헤아려라” 이다. 이것은 상대의 사정을 배려하는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하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헤아릴 때 우리의 영혼에 채워지는 기쁨과 생명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는 자책의 마음이 끼어들 공간이 없다. 둘째는 땅이 아닌 하늘의 복의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22절에 보면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 복이 있도다 말씀하셨는데 교인들은 이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어려움이 올 때 인간적인 분한 마음과 진실을 분별하기 전에 오는 죄책감, 그리고 성령의 핍박에 대한 기쁨의 감사와 상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단이 우리들에게 주는 속임수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분별하면 상급과 소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믿어야 한다. 셋째는 훈련으로 원상복구 되어지길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사랑으로 행하지 않은 이유 중에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얻고 훈련 받지 않기 때문이다. 40절에 보면 “온전하게 된자”는 “원상으로 복구시키다” 라는 의미이며 배우는 훈련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된다. 그래서 기초가 중요하다. 1단계가 중요하다. 주를 향해 가난하고 배고파하고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울고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할 때 그 영혼은 2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예수님 때문에 세상과 충돌하고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미움과 핍박을 받았도 기뻐하고 감사하면 반드시 3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지혜롭게 대처하며 기다리는 사람으로 변해 갈 것이다. 당신은 이런 3단계의 사랑을 하고 있는가?

48-49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행동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하신다. 반면에 행하지 않는 사람은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3단계의 사랑을 하면 영혼이 견고해 진다. 내면은 더욱 담대해 지고 거룩해 진다. 결국 예수님 같이 된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눈에 선한 십자가

갈라디아서 3:1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설교 요약>
갈라디아서 3장 1절을 보자.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갈:3:1/새번역)   예수님은 A.D 33년 4월 3일 오후 3시 경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바울은 A.D 33-36년 사이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다메섹 회심 후 14년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갈라디아서에 말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복음을 전한 지가 길어야 2-3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십자가의 예수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다.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 바울에게 주고 싶어하는 사랑이 가득했다. 그러나 갈라디아 성도들의 마음은 다시 완악해지고 옛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갈라디아 3장 1절을 보자. 갈라디아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고 절기도 지키고 구약의 제사도 다시 지내야 한다는 유혹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변질된 삶의 열매는 다시 예수님 믿기 전에 드러났던 옛 삶의 태도들이었다. 성령의 열매나 육체의 열매는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한 가지 죄악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면 다른 죄악도 연결되어 있다. 성령의 열매 한 가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면 다른 열매도 계속 따라서 드러나기 마련임을 말씀해 준다. 열매는 그 뿌리와 나무의 결과다. 갈라디아 성도들의 완악해져 가는, 육신적이 되어가는 이유는 그들이 복음의 은혜에 기반을 두지 않고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율법으로의 귀향 때문이었다. 외적으로 더 신령하고 거룩하고 타인보다 더 절제하고 금욕적인 삶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분별하기 어렵다. 신실해 보이고 특별해 보이고 경외감을 일으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세속적이고 정욕적이고 서로 비난하고 경쟁하고 움켜쥐고 정죄하는 모습이 강하게 드러난다. 은혜는 반대다. 그 뿌리가 아직도 십자가다. 십자가가 눈에 선한 것 같은 마음은 얼굴과 행동과 삶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바울은 힘이 빠지고 낙담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겠다고 말한다. 다시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그들을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고백한다. 우린 누군가를 섬기고 사랑하다가 누군가가 다시 옛사람으로 율법으로 돌아가면 크게 낙심한다. 그러나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자처했다. 그럴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의 뿌리가 율법이 아니고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눈에 선한 십자가의 능력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바울처럼 세월이 지나도 십자가가 눈에 선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계속 율법이 아닌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죽음의 권세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보자. 이 말씀에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씀이 현재 완료 수동태로 되어 있다. 우리 노력과 힘이 아닌 복음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매 순간 주님이 내 삶의 보좌에 않으시도록 내어드리라. 그럴 때 두가지 은혜가 임한다. 세상의 정욕을 내가 참고 죽이려 하지 않아도 세상의 유혹이 나에게 다가오다가 그냥 힘을 잃고 죽어지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래서 “the world had been crucified to me”라고 했다. 그런가하면 세상 쪽이 아니라 내가 먼저 세상 정욕을 향해 적극적으로 다가서려 하는 욕망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상이 나를 보면서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세상의 권세를 잡는 사단이 우리 뒤에 있는 십자가의 권세, 예수님의 피의 권세를 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죽은 자의 권세다. 변화된 삶은 노력한다고 되지 않는다.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복음을 듣고 십자가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할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산다. 그 다음부터는 그 죽음이 계속 권세가 되어 나의 정욕, 세상 자랑, 욕망, 육의 사람을 죽인다. 내 안에 사랑, 용서, 평안, 기쁨, 겸손, 소망, 비젼, 거룩, 절제는 살아나게 해준다. 이것이 죽음의 권세다. 당신 삶에 눈에 선한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십자가의 그 사랑이 눈에 선한가?

형제를 보게 하는 사랑 <1부> | 높은 부르심 <2부>

<1부 - 양정상 목사님>
요한 일서 3:12-19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부 - 배현석 전도사님>
에베소서 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설교 요약>
본문에 바울은 편지를 받는 자들은 성도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은 평안을 찾지 못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2014년 한 조사기관에 의하면 미국의 18세 이상 성인 중에서 무려 44.7%의 사람들이 정신관련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현대인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정신적인 스트레스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불확실성’(uncertainty)라고 합니다. 이 불확실성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외부적인 것과 내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외부적 불확실성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볼 수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은 그 외부의 불확실성을 ‘믿음’이 필요한 영역으로 봅니다. 그래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장을 도전받습니다. 내적 불확실성은 그 크신 하나님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딸임을 확신할 때 해소되는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다는 것은 당시 어떠한 종교에도 받아드릴 수 없는 충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대교에서도 하나님을 절대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아빠로 두었다면 평안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라는 자신의 부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확인시키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갈1:1)(롬1:1) 이뿐만 아니라 그가 기록한 13개의 목회서신 중에서 11개에서 자신이 사도임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갖힌 자”이다. 이렇게 다른 표현이긴 하지만 역시 본인이 누구인지 주님 안에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밝힘으로서 서신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이토록 강조하면서 서신들을 시작한 것은 그에게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수많은 어려움들을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겪었던 여러가지 폭력과 위험들, 셀 수 없는 고생스런 선교 사역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또 평생동안 독신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특히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 대를 이을 자녀가 없다는 것은 하늘도 버린 저주와 같이 여겨졌기 때문에 그런 사회적 가치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라봤다면, 그가 극심하게 좌절하고 우울해질 이유는 차고 넘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의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바라봤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부르심을 굳건히 붙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눈으로 여러분을 바라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세상의 어떤 낯선 사람의 눈으로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세가지 호칭이 등장합니다. 사도, 성도, 그리스도 입니다. 이 중 ‘성도’라는 호칭은 사실은 굉장히 놀라운 호칭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는 장면이 나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귀신이 소리지르며 일렀습니다. (막1:24)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오늘 ‘성도’라는 단어와 똑같이 쓰인 ‘ἅγιος (하기아스)’입니다. ‘성도’라는 말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거룩한 자’랑 원어로 보면 똑같은 말인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는 자들이 모두 “거룩한 자”라고 말해주고있습니다. 그 정체성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도 보다도 더욱 위대한 이름이 ‘성도’입니다. 그리고 볼 이름은 바로 예수님의 호칭인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인 크리스토스에서 왔고 그 의미는 ‘메시아’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를 가진 호칭이 되는가?(갈2:20)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구절 때문에, 우리 안에 예수가 사시는 삶 “작은 예수”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자세히보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라”.  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 라는 말로서 히브리어로는 ‘메시아’ 입니다. 구원자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구원자-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예수들이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작은 그리스도들, 작은 메시아들! 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 작은 메시아들은 그들 앞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구원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가진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그게 우리가 입은 옷이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 반드시 기억하세요! 인생에 무게에 마음이 내려 앉을 때에 더욱 기억하세요!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하실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을 향한 십자가의 걸음을 시작하세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메시아 예수의 모습이 여러분에게서 환하게 빛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만나지는 은혜

빌립보서 4:19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설교 요약>
만나지는 은혜
빌립보서 4:19절에(NIV) 보면 meet와 glorious riches 이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자.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데 어떻게 우리들을 만나 주시는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신다. 하나님이 만나게 해 주신 사람들은 위로와 격려, 기쁨, 소망을 주며 우리들의 삶을 부여케 한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은 만남은 우리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채워지게 한다. 또한 그 사람들을 우리들의 삶 안으로 이끄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값없이 받은 예수님의 그 사랑과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에 감사해서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난과 희생, 목숨을 드렸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다. 그 만남은 감사로 시작한다. 그러나 한가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해 볼 것이 있다.

필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
누가 복음 17장 17절에 보면 10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다 깨끗함을 받지만 한 명에 사마리아만 다시 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하신다. 19-20절에 보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하신다. 여기서 너는 그의 나병이 아닌 너 자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9명의 나병환자들의 필요는 채워졌지만 더 중요한 구원의 은혜가 아직 임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그 후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을 주목하고 믿으면 병보다 더 중요한 영혼인 그 사람 자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교회를 통해서 삶의 필요는 채워졌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즉 감사한다고 그것이 구원 받은 증거는 아니다. 구원받은 증거는 감사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그분이 자신의 삶에 주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분만을 예배하며 그 은혜가 커서 누군가에게 그 은혜를 주기 위해서 고난과 희생의 일을 자원하는 것이다.

혼동
한 가지 혼동하지 말자. 병 고침을 받은 9명의 나병환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일반 은총은 받았지만 구원 받은 특별 은총은 받지 못한 것이다. 즉 처음부터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영적 리더가 9명과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고 방탕하고 타락한 삶을 살아도 한번 받은 구원이 영원하다고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즉 한번 받은 구원도 이후의 삶에 따라 다시 상실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은 결과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만약에 경고와 두려움으로 삶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하자. 그것은 두 가지 결과가 생긴다. 첫째는 구원 받았기 때문에 주님을 섬기는 못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섬기게 된다. 둘째는 사랑 받았기 때문에 우러나는 헌신이 아니라 사랑 받기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된다.

감사의 능력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천국을 경험해도 내면에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인가? 라고 질문할 수 있다. 요일 4장 18절에 보면 구원을 받았어도 두려움 속에 살수 있다. 하지만 두려움에는 형벌과 고통이 있다 그래서 사랑하며 살라고 하신다. 그 두려움의 뿌리는 잘못된 추측을 통해서 우리들의 생각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그 뿌리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온전한 사랑이다. 그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감사해야 한다.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는 인생을 허비했고 아무것도 아닌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잘못된 추측들을 심어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잘못된 추측을 분별하고 감사해야 한다. 감사는 사람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운다. 빌립보서 4장 7절에 보면 두려움과 걱정이 밀려올 때 감사함으로 기도해라. 그러면 원수는 떠나갈 것이다. 감사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기도로 감사하고 삶으로 감사하라. 둘째는 사람에게 감사하라. 말로 편지로 행위로 감사를 표하라.

깊음과 얕음

누가복음 6:12-19
12 그 무렵에 예수께서 기도하려고 산으로 떠나가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13 날이 밝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열둘은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이라고도 하는 시몬과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배반자가 된 가룟 유다이다.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 거기에 그의 제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또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 및 시돈 해안 지방에서 모여든 많은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 
18 그들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또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몰려온 사람들이다. 악한 귀신에게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은 고침을 받았다. 
19 온 무리가 예수에게 손이라도 대보려고 애를 썼다. 예수에게서 능력이 나와서 그들을 모두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