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를 보게 하는 사랑 <1부> | 높은 부르심 <2부>

<1부 - 양정상 목사님>
요한 일서 3:12-19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부 - 배현석 전도사님>
에베소서 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설교 요약>
본문에 바울은 편지를 받는 자들은 성도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은 평안을 찾지 못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2014년 한 조사기관에 의하면 미국의 18세 이상 성인 중에서 무려 44.7%의 사람들이 정신관련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현대인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정신적인 스트레스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불확실성’(uncertainty)라고 합니다. 이 불확실성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외부적인 것과 내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외부적 불확실성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볼 수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은 그 외부의 불확실성을 ‘믿음’이 필요한 영역으로 봅니다. 그래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장을 도전받습니다. 내적 불확실성은 그 크신 하나님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딸임을 확신할 때 해소되는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다는 것은 당시 어떠한 종교에도 받아드릴 수 없는 충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대교에서도 하나님을 절대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아빠로 두었다면 평안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라는 자신의 부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확인시키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갈1:1)(롬1:1) 이뿐만 아니라 그가 기록한 13개의 목회서신 중에서 11개에서 자신이 사도임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갖힌 자”이다. 이렇게 다른 표현이긴 하지만 역시 본인이 누구인지 주님 안에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밝힘으로서 서신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이토록 강조하면서 서신들을 시작한 것은 그에게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수많은 어려움들을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겪었던 여러가지 폭력과 위험들, 셀 수 없는 고생스런 선교 사역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또 평생동안 독신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특히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 대를 이을 자녀가 없다는 것은 하늘도 버린 저주와 같이 여겨졌기 때문에 그런 사회적 가치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라봤다면, 그가 극심하게 좌절하고 우울해질 이유는 차고 넘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의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바라봤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부르심을 굳건히 붙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눈으로 여러분을 바라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세상의 어떤 낯선 사람의 눈으로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세가지 호칭이 등장합니다. 사도, 성도, 그리스도 입니다. 이 중 ‘성도’라는 호칭은 사실은 굉장히 놀라운 호칭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는 장면이 나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귀신이 소리지르며 일렀습니다. (막1:24)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오늘 ‘성도’라는 단어와 똑같이 쓰인 ‘ἅγιος (하기아스)’입니다. ‘성도’라는 말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거룩한 자’랑 원어로 보면 똑같은 말인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는 자들이 모두 “거룩한 자”라고 말해주고있습니다. 그 정체성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도 보다도 더욱 위대한 이름이 ‘성도’입니다. 그리고 볼 이름은 바로 예수님의 호칭인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인 크리스토스에서 왔고 그 의미는 ‘메시아’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를 가진 호칭이 되는가?(갈2:20)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구절 때문에, 우리 안에 예수가 사시는 삶 “작은 예수”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자세히보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라”.  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 라는 말로서 히브리어로는 ‘메시아’ 입니다. 구원자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구원자-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예수들이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작은 그리스도들, 작은 메시아들! 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 작은 메시아들은 그들 앞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구원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가진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그게 우리가 입은 옷이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 반드시 기억하세요! 인생에 무게에 마음이 내려 앉을 때에 더욱 기억하세요!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하실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을 향한 십자가의 걸음을 시작하세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메시아 예수의 모습이 여러분에게서 환하게 빛나기 시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