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정과 믿음
/누가복음 3:18-23
18 또 기타 여러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설교요약>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자기 앞으로 나서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때 그 군중 사이에 섞여 있던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러 세례 요한 앞으로 나오셨다. 줄 서 있던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인식하거나, 알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 물에서 올라오실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첫째, 비둘기 같은 형체의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했다. 둘째,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을까? 답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어느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수의 무리 속에서 존재감이 희미해질 때
예수님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줄을 서 세례 요한에게로 나아가고 계셨다. 아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사랑 받는 분임을 알지 못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 미미함을 느낄 때가 있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 자체의 가치를 상실하면 슬퍼지고, 우울해지고, 심하면 여러 유혹들에 쉽게 넘어가게 된다. 잘 나고 경쟁적인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나의 말을 들어 줄 누군가가 그리워 질 때가 있다. 하나님은 이 때, 우리에게 주목하시며 하늘을 여시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시고 싶어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대단한 일을 이루지 못했어도, 우리가 어떤 것으로 인해 기뻐할 때, 우리의 기쁨을 더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당신은 오늘도 당신을 향해 이유 없이, 조건 없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다, 너는 내 기쁨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있는가?
공적 사역으로 여러가지 내면의 소리를 들을 때
예수님은 30년 동안 목수의 아들로 이름 없이 살았다.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신 후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다.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은 '일을 그르치지 말아라, 멋지게 일을 해야 한다, 일주일에 금식은 몇 번 해야 한다'류의 음성이 아니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자다' 라는 음성이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하나님의 이러한 음성과 마음이 항상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옆에 있는 사람의 사역을 보니 그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것 같아.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지? 나는 왜 이렇게 능력이 없지?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해' 라는 음성도 들릴 때가 있다. 식물의 생명이 뿌리에 있음 같이, 사역의 뿌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뿌리가 뽑히거나 상하면 줄기나 가지나 열매나 모두 금방 시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열매가 더디 맺혀도, 외적인 식물의 형태가 초라해 보여도, 뿌리만 튼튼하면, 언젠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일을 했을때, 그것에 대해 인정 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넣어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 이유는 우리를 보고 있고, 인정해 주는 어떤 존재가 반드시 있음을 의식하며 우리가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때로 희생을 해야 하고, 헌신을 하게 되더라도, 계속해서 기쁨으로 그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건강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어려운 상황과 어려운 사람들을 만날 때
헤롯 안디바는 선을 알면서도 악을 선택한다(19-20절). 이런 인격을 형성하게 된 이유는 아버지 헤롯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헤롯은 자기 두 딸과 아내를 죽이고, 충직한 신하들을 감옥에 보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그 지역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모두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성장한 자녀들은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부모의 사랑으로 채워져야 할 내면은 사랑이 아닌 공포와 불안으로, 그리고 곧 헤로디아가 아버지 헤롯의 사랑으로 채워졌어야 할 안디바의 내면을 대체 하였다. 헤로디아는 그를 악하게 조종하였다. 하나님은 안디바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세례 요한을 통해 다시 주셨다. 그러나 그는 세례 요한을 죽였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죽인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헤롯 안디바 혹은 헤로디아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성장 과정부터 꼬이고 묶인 사람들이다. 그런 배경 속에서 자라나며 잘못 형성된 인격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때로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 넣는다. 심하면 판단력도 흐려진다. 더 심하면 사람들의 행동과 말에 의해 깊은 우울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비둘기 같은 형상의 성령으로 오실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채워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고전 2:11-12) 분별력과 은혜로 우리는 이미 주신 선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확인의 방법 : 흥정인가? 신뢰인가?
예수님 물에서 올라오신 것은 세례 요한의 인도 덕이였다. 예수님이 인간의 손을 의지한 것은 인정과 사랑 때문이다. 이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들려왔다. 구약에 나병 환자였던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몸을 여섯번이 아니라 일곱번째 몸을 담글 때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처럼 회복되었다.
물은 말씀이다. 물은 예배 속에 흐르는 성령이다. 찬양과 기도 속에 흐르는 성령이다. 일곱번은 반복을 의미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 속으로 계속 반복해서 들어갈 때 우리 삶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고, 닫혀있던 것들이 열리기 시작한다. 한 번 두 번 해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만두는 것은 흥정이고 조건적인 믿음이다. 몸이 물로 들어갈 때 마음도 영혼도 들어간다. 그래서 예수님도 친히 자신의 몸을 세례 요한에 맡기시며 물 속에 잠기셨다.
당신은 계속해서 그 성령의 강물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가? 말씀의 강물 안으로 반복적으로 들어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흥정이 아닌 믿음으로 주를 따르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