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분노

사도행전 5:33-42
33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쌔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36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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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하다가 두번째 투옥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가 그들을 감옥 밖으로 이끌어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했다. 이튿날 이 사실을 모른채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감옥에서 끌어내오라고 했다. 부하들은 감옥문도 그대로고 지키는 사람들도 그대로되 갇혔던 사람들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 시각 풀려난 사도들은 성전에서 가르치고있었다. 성전 책임자와 제사장들은 이 일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난 것에 개의치 않고 성전에서 사도들을 끌어 오라고 했고 성전 담당자와 부하들은 그들을 잡아왔다. 그리고 유대인의 정치적 공회 앞에 그들을 세웠다. 공회는 사도들에게 왜 예수를 전하는가 심문했다. 그때 그들은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5:31) 라고 담대히 대답했다.  이때 종교지도자들로 구성된 공회는 사도들을 죽이려 했다.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행:5:33)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가는 것은 왜 종교지도자들이 그토록 사도들에게 분노하고 죽이려 까지 했을까? 이다.

그것에 대해 사도행전 5장 28절이 대답을 주고있다.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함이로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다고 하심으로 자신들이 죄인이 되는것을 참지못했다. 자신들은 거룩하고 구별되고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여기는데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죽인 그들을 죄인으로 정죄한다.

사람이 분노하는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자신이 어떤일을 해야 했는데 그것을 하지 못했을때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그 분노는 수치심과 죄의식을 동반한다.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동안  누군가 타인이 우리에게 피해를 주거나 혹은 우리 자신이 죄책감을 가질때 분노하는 연약한 죄성을 가진 인간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분노는 더 쉽게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주는 겸손한 분노다. 그러나 교만한 분노가 있다.이 둘 중에 하나님께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분노는 두번째 교만한 분노다. 사도들이 종교지도자들에게 한 말을 다시 보자.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5:31) 하나님은 그들을 정죄하고 파멸시키고 심판하시기 위해 사도들로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걸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이었다고 전하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들과 사람들에게 사도들을 보내셨다.

성경에는 첫번째 분노를 가진 사람들이 먼저 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들은 창녀들, 세리들, 죄인들이라고 만 생각하기 쉽다. 그 당시 사회의 낮은 계층의 천박한 삶을살던 죄인들이니 당연했겠지 라고 치부할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도덕적 명성과 수양을 가진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 백부장, 헤롯왕의 메니저 였던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로마의 장교 고넬료 같은 사람들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예수님께 나와 죄사함을 받았다.  이들은  자신의 신분이나 가진것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나와 자신들의 분노를 인정한 겸손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 들은 분노하면서도  그것이 자신들의 위선과 우월감과 교만에 기초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분노에 머물러 있는가? 겸손한 분노인가? 교만한 분노인가?

당신이 만약 당신의 겸손한 분노를 보았다면 당신에게는 한가지 분명한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맹목적으로 고난 자체를  기뻐하지 않고 고난받는 동기를 기뻐한다

사도들은 다시 매를 맞고 풀려났다. 이 매는 당시 유대법정에서 죄인에게 때렸던 39대의 채찍질 이었다. 그러나 온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을 맞고도 그들은 기뻐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베드로와 사도들이 이런 끔찍한 매를 맞고도 기뻐한 이유는 자신들이 이런 고난을 당할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이 무엇인가 희생을 했다라고 하는데서 오는 자기만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가치를 알았다. 그래서 악한 사단이 그것을 싫어해 권세자들을 통해 자신들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거듭난 사람은 무엇이 가치있는 일인가를 본능적으로 안다. 그 내면에서 예수님의영인 성령이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에서 가치를 찿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게 된다. 직장 내부의 동료들과 직장밖의 고객들과 관계를 맺고 산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기쁨을 주는 사람도 있고 고통을 주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삶을 힘들게 하고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을 대하면서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이때  그리스도인이든 비 그리스도인이든  인내로 그런 사람들을 견디어 낼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견디어 내는 동기는 완전히 다를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인내의 시간에 로마서의 말씀을 떠올릴수 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이 말씀을 통해 인내는 인격을 만들어 냄을 알수있다. 그 인격이 성숙해 질수록 자신만 생각하며 살던 이기적인 삶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치유하고 소망을 주는 삶으로 사용되어 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인내한다. 자신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 이기에 어떤 상황이 되어도 쉽게 태도를 바꾸지 않고 진실하게 행동할수 있다. 그러나 비 그리스도인은 이런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수입을 위해 참을수 있다. 화내면 자신만 손해이니 참을수 있다. 타인에게 넓은 마음의 소유자임으로 인정받고 싶어 참을수 있다. 혹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조건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참을수 있다. 그것은 수입과 연관이 안될때면 언제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할수 있다. 타인이 평가가 자신이 원했던 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태도를 돌변할수 있다. 자신이 자존감이 낮아서 바보처럼 당했다고 생각이 들면 정반대의 모습을 보일수 있다.

다음은 하나님께 겸손히 자신의 분노를 회개하고 매일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삶에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해 가시는지 보자.

종교지도자들인 공회원들이 사도들의 당당한 반응을 보며 그들을 죽이려 했다. 그들은 얼마든지 종교적인 이유로 사도들을 죽일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들중에 가말리엘이라는 공회의원이 침착하게 일어나 사도들을 내보내고 그들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사도행전 6장 38-39절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사람으로 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으로 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이 말을 한 가말리엘을 누가는 이렇게 소개한다. 34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행5:34) (행:22:3) 그는 분노에 들끓는 공회의원들을 향해 두 사람의 예를 들며 사도들을 죽이는 것을 만류했다. 하나는 드다로 그는 사람들을 미혹해 요단강을 갈라지게 해 보이겠다던 유대인 마술사 였다. 로마 총독은 군대를 보내어 드다를 참수형시키고 군중을 체포했다. 그리고 주후 6년 갈릴리 유다라는 사람은 세금반란을 주도했다. 그도 후에 도망하고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흩어졌다. 그러나 이 사도들을 죽이지 말고 그것을 하나님께맡기라고 했다. 하나님께로 부터 온것이면 그것을 막을수 없고 사람에게 온것이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공회는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따르던 가말리엘의 말을 들었다. 이 일로 사도들은 죽음직전에 극적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성전으로 돌아가 다시 예수는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속해서 전하고 가르쳤다. 가말리엘은 아직 예수님은 몰랐지만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감옥분이 그대로 있는채로 사도들이 밖으로 나가게 된것을 깊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사도들이 자신들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고 얼마전에 죽은 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전하는 것을 주목했을 것이다. 그리고 셀수없는 무리가 회개하며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변화되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의 내면은 예수님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가말리엘 처럼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면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무너지지 않는다' 라는 '하나님을 위해 살면 하나님이 쓰시다가 버리지 않으신다' 라는 믿음을 갖기를 원하신다. 또한 급박한 상황에 하나님이 완벽한 타이밍으로 우리에게 사람을 보내신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일수 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를 돕게 하실수 있다. 당신은 이것을 믿는가?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이 주께 있음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존할수 있도록 계속해서 오늘도 가말리엘을 일으키시는 분이시다. 가말리엘의 뜻은 '하나님이 선하게 보답하신다' 이다. 천사장 가브리엘과 이름이 비슷하다. '하나님의 사람' 가말리엘은 변장한 천사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인내를 연단, 즉 주를 위해 인격으로 성화시키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가말리엘을 보내주신다. 그들의 생존을 보호해 주신다. 겸손히 회개하는 자들에게 가말리엘로 인도해 주신다.

유치한 순종

사도행전 5:12-32
12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16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23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
27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손을 움직여라.

12절을 보자.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사도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의 손을 사용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이 손을 통해 사람들을 축복하며 섬길 때 그들의 손을 통해 표적과 기사를 일어나게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손을 주신 것은 우리의 손을 통해 사람들을 풀어놓고 치유하고 축복해 주는 기적을 행하시기 위함이다. 엘리사가 요아스왕에게 화살을 들어 땅에 쏘게 한 사건이나 여호수아가 그의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복병을 움직이도록 하는 행위가 유치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요아스왕이나 여호수아에게 어린아이처럼 그들의 손을 움직이게 하신 것이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순종했고 요아스왕은 불순종함으로 승리와 패배로 갈라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손으로 하는 일이 아무리 유치한 일처럼 보여도 성실함과 신중함으로 포기하지 않고 해야 함을 주목해야 한다. 또한 그 일이 아무리 작아 보이고 유치하게 보일지라고 성령의 인도를 받기를 갈망하고 묻는 자세로 할 때 생각하지 못한 결과가 일어남을 주목해야 한다.

감동 받는 비 그리스도인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행: 5:13) 에서 그 나머지 분들은 비 그리스도인이지만 사도들과 그리스도인을 칭찬했다. 우리가 유치해 보이는 일에도 성령의 인도를 의지하며 진실과 성실로 우리의 손을 드릴 때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직 믿지는 않아도 우리를 칭찬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누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은 부담감이 없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 보이며 살기에 자유 함이 있다. 그러려면 내면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사람을 의식하기 전에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즉 하나님을 의식하면 할수록 더욱 자유게 된다.

베드로의 그림자까지도 사용하심

15-16절을 보자.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느니라' 이 말씀에서 마음에 감동을 주는 대목은 사람들이 병든 사람과 귀신들린 사람을 데리고 거리에 나가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닿을 수 있도록 사모한 것이다. 즉 성령의 역사는 한 사람이 자진해서 누군가를 위해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최상의 환경과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까지 포함해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것들을 다 바쳐 희생하는 모습이다.

삶의 감옥을 통해서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게 한다.

하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을 이용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신 것과 같이 이번에도 사도들을 감옥에 가둔 것처럼 보여진다. 사도들을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주의 천사가 찾아와 옥문을 열고 데리고 나와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고 하는 새로운 확인을 해주셨다. 그들은 즉시 순종하며 새벽에 사람들에게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쳤다.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나를 쉽게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그분께 맡기고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

요즘 당신이 만난 삶의 쇠고랑은 무엇인가?

쇠고랑은 종종 우리 내면에 보이지 않는 우상과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 우상이 드러나면 죄를 회개하고 그것과 반대되는 미래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묵상하고 적어보라.

이것이 바로 유치한 순종에서부터 시작된 축복들이다. 하나님께 당신의 작고 유치한 순종을 드려라. 

성령에 민감하라

사도행전 5:1-11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 오니 
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은혜를 흡수하는 마음

사도행전 4:32-37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인생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사도행전 4:1-10, 30-31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는 폭발이 있었던 지표의 지점을 뜻하는 용어이다. 공중에서 폭발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폭발한 장소 바로 아래 지표면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에서 '그라운드 제로' 란 처참하게 무너진 삶의 시간과 장소를 의미한다.

하나님을 따르면서 처절하게 실패를 경험하고 절망하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때 자신감을 잃어 버리고 미래에 대한 소망은 점점 사라져 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절망하고 좌절할때  기대하지 않는 것들을 기대치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이루신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자신의 경험이나 예측이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만을 의지해서 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으로 심는 것일까?

예수님께로 부터 온 권세와 능력의 확신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주님을 따를때 우리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태도 혹은 상황에 의해 흔들린다. 우리가 어떤일을 하다가 절망하고 포기하게 될때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은 내면의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커질때 처한 상황으로 부터 회피하거나 포기한다. 그 두려움의 근원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처음에 그 일을 시작하고 장소에 와있는 것을 자신혼자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을 시작하게 했다고 믿으면 그분이 순간순간 책임져 주실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분을 의지하고 어려운 순간들 속에서 하나님이 계속 돕는 일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어떤 능력이 필요한데 그 능력이 없다라고 생각될때 절망하기 보다는 그 능력을 공급하시는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그 능력이 일회적이 아니라 계속 공급됨을 체험하게 된다.

자신의 유익과 해 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한다

 성령으로 심는다는 것은  가장 먼저 자신에게 돌아올 유익이나 혹은 해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먼저 선택하는 것이다. 만약 그분을 선택할때 그것이  사람의 뜻과 대치될때는 분명하게 먼저 하나님의 일을 선택한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높여야 하는가?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사랑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만드신 아버지 이시기 때문이다. 부모는 조건없이 자녀를 사랑하고 신뢰한다. 자녀는 부모를 조건없이 사랑하고 신뢰한다. 왜 삶에서 하나님을 높이는가를 가지고 공격한다면 그것은 부모에게 자녀에게 연인에게 왜 사랑하고 신뢰하는가 조건을 묻는것과 같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우리 삶의 무너졌던 그라운 제로에 데려가는 것은 다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높이지 않고 그분을 높임으로 우리의 영혼이 영화롭게 되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젼을 쫓아간다  

성령으로 심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젼을 쫓아간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젼과 내가 만들어 낸 비젼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나?

첫째.  하나님은  주신 비젼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상기 시켜 주신다

둘째.  하나님이 주신 비젼은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고 더욱 강해진다

세째.  하나님이 주신 비젼은 불가능해 보이는 특징이 있다. 

네째. 하나님이 주신 비젼은 그 중심에 사람이 있다

당신은 성령으로 심는 사람인가? 성령으로 심는 삶은 우리가 볼수없고 인지할수 없는 사이에도 계속 하나님이 그 열매들을 일으키신다. 하룻밤 사이에 5천명의 영혼을 움직이시것 처럼...

하나님이 당신을 다시 그라운 제로에 세우실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