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어진 보호

사도행전 21:1-36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15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설교요약>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위험과 환란이 기다린다는 성령의 증언들을 들었다. 그럼에도 주저함 없이 예루살렘으로 출발해, 배를 타고 이스라엘의 북쪽 두로에 도착했다. 두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 우상들의 근원지였고, 이스라엘 전역에 우상이 들어오게 했던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도시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역사를 가진 두로에 바울이 도착했음에도 그곳에는 이미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두로에 교회가 생긴 역사를 되짚어 보면, 21년전에 예수님에게 56km 의 거리를 걸어와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자신의 나라 두로 사람들에게 전해주었고 그 소식을 들은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보자 마자 준비되었다는 듯이 예수님께 나가 무릎 꿇고 큰 믿음으로 간구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로부터 약 28여년 후에 바울은 자신의 생애에 큰 환난을 앞둔 시기에 두로의 제자들로부터 위로와 따뜻한 환대를 받고 있었다.

특히 이 두로의 귀신들린 딸문제로 예수님께 나간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혹독한 대우를 받았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6) 라며 거절감을 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거절감 어린 말을 개의치 않고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믿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마: 15:27) 예수님은 짧은 시간에 이 여인의 소원을 들어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믿음을 강하게 훈련 시키셨다. 하나님이 이 여인을 통해 주시는 음성은 하나님에게 거절감을 느끼는 상황을 맞이해도 사랑받고 있는 사람임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말하며 산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이 오거나 반대로 안락하고 편안한 삶이 되면 너무도 쉽게 그분의 나를 향한 사랑의 감각을 잃어 버리게 된다. 이것에 대해 기독교 작가 필립얀시가 지적한 톨스토이와 도스 토예프스키의 이야기를 나눠본다.

톨스토이는 온갖 규율과 말씀을 지키는 척 하지만 결국은 위선적인 자신의 모습만을 발견해 가다 결국 부랑자로 죽었다고 하며,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음울한소설을 쓰고 술과 도박으로 건 강과 재산을 탕진했지만, 죄를 짓고 체포되어 죄수용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로 가는 길에 어느 여인을 통해 성경한권을 전해 받고 신약성경을 통독한다. 그는 감옥에서 인간을 악의 절정을 보게 되고 또 그럼에도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만나게 된다.

바울은 두로 가이사랴를 거처 이스라엘에 도착하고 7일째가 되었을 때 그가 율법을 비방하고 성전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돌로 쳐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은 천부장으로 군인들을 모아 현장으로 가게 해 바울을 지켜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전 여러번 그가 위험에 처하고 죽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셨지만, 보호를 예비해두신 것은 미리 알려주시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는 그의 삶의 결단과 함께 미래의 축복을 말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그가 주님을 따르는 시간이 오래되어 갈 때 주님은 고난(이삭 바침) 만 이야기 하고 이삭대신 양을 메 놓을 것이나 그 고난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그를 향한 축복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 시어머니를 따라나선 룻에게도 앞으로 있을 고난만 예견 되었지 그녀를 향한 보아스 와 영적인 축복들을 조금도 이야기 해주지 않으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성품 중 하나다. 하나님은 때론 고난과 함께 축복도 말씀하시지만 때론 앞으로 겪게 될 고난만 말씀 하시고 보호와 축복은 감추시기도 한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의 사랑을 보고싶어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 한 많은 말들의 홍수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향한 사랑을 삶으로 행동으로 순종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드물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향해 아무런 유익이나 번쩍거리는 찬사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함께 있어주고 변함없이 사랑해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이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약속해 준적도 있지만 장차 있을 고난만 이야기 하곤 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사랑의 고백을 듣는 것뿐 만이 아니라 보고싶어 하셨다. 이것이 보호 와 축복을 감추신 이유다.

홀로 걸어야 하는 시간

사도행전 23:13-38
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설교요약>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지않고 도보로 하루가 걸리는 거리를 홀로 간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홀로 있는 시간동안 성령께서 예루살렘에서 있을 환난과 고난을 미리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려움이 오면 본능적으로 사람을 찾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이 찾아오면 먼저 하나님을 찾는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의 앞에 그 어떤 환란과 고난을 성령 으로 직감하고 혼자가 아닌 하나님과 함께 걸었던 것이다.

• 고난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받을 고난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급히 가려고 애쓰고 있다. 그렇게 확고하게 자신이 갈곳과 있어야 할 곳을 알수있었던것은 바울이 하나님과 홀로 있던 시간에 얻어진 것이다. 우리가 홀로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이 깊어질때, 혹은 혼자 있을때도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는 축복이 주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가야 할 곳이 어려운 곳인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길 원하시는 곳인지를 결정하고 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님도 성만찬 후에 체포될 것 을 아셨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에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당신의 삶에 기쁨과 하나님을 사랑함이 있다면 당신은 홀로 하나님 앞으로 나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반대로 당신의 마음에 기쁨이 점점 희미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희미해 지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 보다 다른것에 더 집착해 가고 있는 사람일수 있다.

• 혼자 있을 때 자신의 헌신과 희생의 분명한 목적을 알게 된다.
바울이 미둘레네에서 에베소의 지도자들과 다시 말씀으로 훈련하며 이 두 가지를 상기시켰다. 첫째는 바울의 헌신의 목적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길 원하는 확실한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헌신과 희생이 삶의 목적이 되면 위험하게 된다. 희생과 헌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의 목적이다. 그 목적이 상실하면 희생과 헌신이 자기의 우상이 된다. 당신의 희생과 헌신으로 한 영혼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만나는지 명심해야 한다.

• 홀로 있는 시간은 성령이 사람들을 감독자로 세우고 인도하고 계심을 보게 해준다.
28절에 보면 바울은 두란노에서 12명의 제자를 세우고 양육한 것이 본인의 노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성령님이 감독하고 계심을 알고 있었다. 우리의 영혼이 약해질 때 나타나는 증상 중에 하나는 내가 모든 것을 하고 있다라고 하는 생각이 증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셔야만 볼 수 있는 일이다.

• 홀로 있는 시간은 사랑과 정이 있는 사람으로 세운다.
36-38절에 보면 예수님을 믿고 성령이 임하면 매정하고 냉정하던 사람이 사랑과 정이 많은 사람으로 바뀐다. 또한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 보면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사람이 성장하는 것을 알고 있다. 말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미숙함을 깨닫는다. 깨달으면서 생각하고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꾼다. 그리스도인은 사랑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고민한다. 원수도 사랑하라 했는데 원수가 아닌데도 사랑이 가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고민한다.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을 기대하면 안 된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옮기고 떠나야 한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사랑하게 되기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살려고 할 때 우리의 사랑은 점점 성숙되어 간다. 바울은 오래 참았다. 바울은 불같은 그의 성격을 온유함으로 변하려 생각했고 깨닫고 성장해 갔다.

우리는 홀로 있는 시간들을 통해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들 을 통해 다시 순수한 정과 눈물과 인간미를 회복한다. 사람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자신의 마음에 정과 눈물과 인간미를 잃고 냉정하고 무정해 질 때다. 이런 내면의 정과 사랑은 스스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면서 깊은 자존감과 내면의 견고함을 갖게 해준다. 

깨어 있는 감사

골로새서 4:2
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설교요약>
• 감사하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이다
성경에는 '깨어 있으라' 라는 말씀이 많다. 감사 속에는 사랑, 겸손, 진실, 섬김, 기쁨, 소망이 모두 들어있다. 그러나 감사하지 않고 불평하는 사람에게서는 쉽게 교만함을 찾아볼 수있다. 그 교만 안에는 위선, 미움, 슬픔, 절망도 함께 있다.

• 원망할 때 모든 축복은 불행으로 바뀐다
광야에서 모세의 명령을 받고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보낸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이 재앙으로 죽고 오직 2명만이 생존했다. 이런 결과의 원인은 감사와 원망에서 비롯되었다. 죽은 10명은 원망했고, 그 원망에는 세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했다. 이들은 자신들만 원망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실 축복들을 원망하게 했다. 둘째, 아직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그 땅을 악평했다. 셋째,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원망하고 남들도 원망하게 했다. 살아 남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감사의 특징도 세가지였다. 첫째, 이들은 온 회중으로 감사하게 만들었다. 둘째, 하나님이 약속한 그 땅을 그냥 아름답다고 하지 않고 심히 아름답다고 했다. 셋째, 지도자를 대적하는 자들을 향해 '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민:14:9) 며 사람들로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존중하게 했다. 결국 원망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려 했던 모든 축복을 발로 걷어찬 셈이 되었다. 그러나 감사한 사람들은 그 모든 축복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밟는 축복을 누렸다. 바울은 구약의 이런 사건을 거울로 삼고 원망치 말고 감사하라며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9-10) 신약의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이 삼 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불평하고 원망한 내용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보통 오랜 시간 공동 생활을 하다 보면 불편함 점이 많고, 그 가운데 서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특별히 제자들의 불평 불만을 한 기록들이 없다.

• 막막한 상황이 와도 먼저 다시 감사하라
그러나 그렇다고 딱히 감사를 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동거동락하셨던 예수님에게서 감사의 모습이 드러난다. 오천명의 굶주린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주님께 드린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개를 가지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gave thanks)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요:6:11) 예수님은 어떻게 이 작은 음식으로 오천명을 먹일 수 있나요? 라며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막막한 현실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셨다. 이 말씀을 기록한 저자는 사도 요한 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감사의 모습을 그냥 건성으로 보고 지나갈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이 먹고 남은 조각들을 모두 버리지 못하게 하시고 바구니에 담게 하신 것도 기록했다. 또한 바로 후에 다시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사천명이 먹고 남은 것을 일곱 광주리에 거두게 하셨다. 이 것은 후에 배고플 때 먹게 할 용도로도 모으게 하셨지만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들을 잊지 말고 다시 그런 상황이 오면 먼저 감사하고 그 은혜를 붙들고 기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증거가 거둔 일곱 광주리 떡 다음 이야기에 있다. 배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건너편으로 가는 도중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떡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이스트(누룩)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이스트처럼 작은 그들의 영향력에 빵 전체가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쉽게 착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악한 영향력이 퍼지는 것에 대한 경고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누룩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이 일곱 광주리 거둔 떡을 가지고 오지 못한 것 때문에 그런 줄 알고 서로 눈치를 보면 이야기 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개로 사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마:16:9-10)

• 떡과 물고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물고기는 훈제 되었거나 이미 요리가 되있었던 한 끼 음식이었음을 고려할 때 말라 비틀어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온몸이 비틀어지고 일그러지는 고통을 상징한다. 따라서 열 두 광주리와 일 곱 광주리에 거두게 하신 떡과 물고기는 생명의 양식으로 오신 예수님이 주신 구원을 한시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우리는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빛 안으로 들어왔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어둠에서 구해 주신 것을 감사하는가? 그렇다면 깨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막막하고 답답한 상황이 와도 열 두 광주리를 붙들고 먼저 감사하는가? 그렇다면 깨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직 주시지 않았지만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을 갈렙처럼, 여호수아처럼 먼저 감사하는가?
그렇다면 깨어 있는 것이다. 

살아야 할 청년 유두고

사도행전 20:1-12
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 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설교 요약>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열심히 하나님이 계신 여러 모임에 참석해도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음을 청년 유두고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유두고처럼 죽어버린 이 시대의 청년들의 영혼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다음 4가지 영적 원리를 기억하자.
첫째, 먼저 청년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둘째, 삶으로, 행동으로, 말씀대로 사는 모습의 본을 보여준다.
셋째, 어떤 형태로든 영적으로 죽어 있는 청년들을 계속 끌어안고, 말씀을 심어주고, 사랑을 주고, 지도자로 세워주려 한다.
네째, 소망을 주고,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그들 곁에 서 있어야 한다.

성령님께서 유두고의 이야기를 바울의 드로아 사역 중  대표적 일로 기록하게 하신  이유는 청년의 때에 살아 있는 영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는 삶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청년에 때에 하나님이 낛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는 자들에게 진정한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다.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찾으면 기쁨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청년의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낛’, ‘기쁨'인 것이다.

둘째, 노년의 때에는 생각해 내는 일이 어렵고 받아들이는데 둔해지기 때문이다. 
청년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가장 크게 누릴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을 만지실 때 흘러나오는 통로다. 이 때의 생각들은 하늘의 영감과 통찰력과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확신과 소망들로, 그것들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을 보고 체험하는 축복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연로해지면 생각도 노쇠해지고, 영감과 소망도 현저히 약해지므로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열정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체험하는데 헌신한다는 것이다. 체험의 가장 큰 장애물인 ‘실패에 대한 두려움’ 또한 수많은 실패의 체험을 통해 제자들이 스스로의 연약함을 보고 주님을 어떻게 신뢰하게할지 깨닫게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도 극복할 수 있다. 신중한 것도 좋지만 상황과 타인의 평가를 너무 두려워만해서는 어떠한 일도 해낼 수 없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주실 때 열정적으로 체험하고 도전하라. 그 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게 될 것이다. 

두 가지 평안

요한복음 14:27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017 CROSS 특별 예배

<설교요약>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두 가지 평안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과 세상이 주는 평안이다.

• 세상이 주는 평안
첫째: 탐심과 연결되어 쉴 수 없는 평안이다(눅12:19)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한 부자가 많은 재산을 쌓아 놓고 이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속삭인다. 이 사람의 평안은 자신의 재산과 소유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소유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소유에 생명을 걸고 사는데 문제가 있다. 이것에 대한 해결점은 20-21 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세상의 평안은 탐심과 연결되어 있고 그 탐심은 상황에 따라 사람을 쉬지 못하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의 탐심으로부터 오는 평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가려면 자신이 가진 소유를 하나님의 자리에 놓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오늘 생명을 잃으면 그 소유가 자신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가진 소유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천국의 평안이 오기 때문이다.

둘째: 고통과 상처와 천대를 주는 평안이다(요19:3)
요한복음 19장 3절에 보면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에게 고통과 치욕, 멸시를 주기 위해서 왕이나 귀족들이 입었던 자색 옷을 입히고 손으로 때리면서 평안하라고 속삭였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다. 이러한 세상의 평안은 예수님의 몸에 자색 옷을 입혀 주는 것처럼 일시적인 고통을 잊게해 주지만, 후에 수치와 고통, 두려움이 동반된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결과를 알면서도 이 세상의 평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 그럼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어떤 것일까?
첫째: 예수님의 평안은 예수님의 은혜로 치유 받았지만 스스로를 부정한 존재로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평안이다. (막5:33-34)
마가복음에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나온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한 번만 만지면 나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어서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고, 병이 낳았다. 하지만 그녀는 유대교의 율법 때문에 두려워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을 믿으면 성경 말씀대로 살지 못할거라는 죄책감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 여인처럼 예수님이 부르실 때 여전히 예수님과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 느끼며 살 수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 5장 33-34절에 보면 예수님은 여러가지 은혜의 통로를 통해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평안함과 자유함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가고 계시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평안이다. 마태복음 6장 34절에 보면 예수님의 평안이 임하면 내일 일에 대해서 준비해도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축복이다. 세상의 평안은 불안이 올 때 세상의 일시적인 쾌락과 흥분을 주는 곳으로 도피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 두려움과 정면으로 부딪치며 그것을 하나님께 올려 드린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불안과 두려움의 일상 속에서도 기도를 통해 오히려 더 큰 평안과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경험하게 된다. 내일 일은 우리가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내일' 이라는 명사는 인격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일을 주장하고 있는 인격이신 하나님이 내일을 주관하도록 맡기라는 의미가 된다. 내일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라. 그 분이 우리의 내일을 미리 준비하시고 인도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