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평안

요한복음 14:27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017 CROSS 특별 예배

<설교요약>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두 가지 평안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과 세상이 주는 평안이다.

• 세상이 주는 평안
첫째: 탐심과 연결되어 쉴 수 없는 평안이다(눅12:19)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한 부자가 많은 재산을 쌓아 놓고 이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속삭인다. 이 사람의 평안은 자신의 재산과 소유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소유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소유에 생명을 걸고 사는데 문제가 있다. 이것에 대한 해결점은 20-21 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세상의 평안은 탐심과 연결되어 있고 그 탐심은 상황에 따라 사람을 쉬지 못하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의 탐심으로부터 오는 평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가려면 자신이 가진 소유를 하나님의 자리에 놓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오늘 생명을 잃으면 그 소유가 자신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가진 소유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천국의 평안이 오기 때문이다.

둘째: 고통과 상처와 천대를 주는 평안이다(요19:3)
요한복음 19장 3절에 보면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에게 고통과 치욕, 멸시를 주기 위해서 왕이나 귀족들이 입었던 자색 옷을 입히고 손으로 때리면서 평안하라고 속삭였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다. 이러한 세상의 평안은 예수님의 몸에 자색 옷을 입혀 주는 것처럼 일시적인 고통을 잊게해 주지만, 후에 수치와 고통, 두려움이 동반된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결과를 알면서도 이 세상의 평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 그럼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어떤 것일까?
첫째: 예수님의 평안은 예수님의 은혜로 치유 받았지만 스스로를 부정한 존재로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평안이다. (막5:33-34)
마가복음에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나온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한 번만 만지면 나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어서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고, 병이 낳았다. 하지만 그녀는 유대교의 율법 때문에 두려워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을 믿으면 성경 말씀대로 살지 못할거라는 죄책감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 여인처럼 예수님이 부르실 때 여전히 예수님과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 느끼며 살 수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 5장 33-34절에 보면 예수님은 여러가지 은혜의 통로를 통해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평안함과 자유함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가고 계시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평안이다. 마태복음 6장 34절에 보면 예수님의 평안이 임하면 내일 일에 대해서 준비해도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축복이다. 세상의 평안은 불안이 올 때 세상의 일시적인 쾌락과 흥분을 주는 곳으로 도피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 두려움과 정면으로 부딪치며 그것을 하나님께 올려 드린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불안과 두려움의 일상 속에서도 기도를 통해 오히려 더 큰 평안과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경험하게 된다. 내일 일은 우리가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내일' 이라는 명사는 인격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일을 주장하고 있는 인격이신 하나님이 내일을 주관하도록 맡기라는 의미가 된다. 내일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라. 그 분이 우리의 내일을 미리 준비하시고 인도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