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에서 찬송하라

에베소서 1:3-14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요약>

바울은 고린도, 빌립보 등 당시의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워나갔다. 대도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열방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에베소는 바울에게 아주 특별한 곳이었다. 에베소는 다른 대도시들과 달리 정치, 군사, 무역이 발달한 곳이 아닌 종교의 중심지였다. 종교의 중심지였던 만큼 에베소에는 에베소 주변 황제들의 신전들보다 웅장했던 아르테미스 성전이 있는데 이 성전을 통해서 에베소는 주된 재정적인 공급원으로 삼았다. 신상과 기념품, 여관업, 대금업, 은행업을 했고 주술, 마술하는 무당 그리고 몸을 팔았던 신창들도 가득한 곳이었다.


이런 도시에 바울은 왜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자신이 다닌 선교지 중 가장 오랜 시간인 3년을 머물렀을까? 에베소야말로 거짓 신과 욕망을 좇는 열방의 영혼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가장 어두운 그곳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빛이 절실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제자들('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전, 그래서 서로 '제자'로 호칭)이 성령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을 알고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기도를 해주었고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일어나 그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이 시대의 에베소

에베소에도 장로들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우상과 전혀 상관없는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아주 힘들었을 것이다. 도시 전체가 아데미 신전의 덕으로 운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있었다.

현대인들과는 달리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업을 자아 성취의 기회로 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상숭배와 관련된 자신의 직업으로 인한 내적, 외적 갈등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직업들을 다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다. 사실상 우상과 관계없는 직업을 찾으려면 그들 모두 에베소라는 도시 자체를 떠나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누구보다 그 현실과 그들의 고통을 알았으나 주님의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지 말고 그곳에서 도리어 예배하고 말씀을 흥황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행 20:28)

주변에 사진의 일을 즐거워하고 보람을 느끼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 것이다. "능동적"이 아닌 "수동적"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직장인은 일생에 평균 60%라는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는데 직장을 싫어한다고 하니 불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도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어쩌면 더 심각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한복음 15:19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였으니 세상은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다. 비그리스도인들 처럼 세상에 묻혀서 살지 않고 세상이 나를 미워할 때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환한 빛을 세상에 비출 때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미워하는 사람들도 언제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서 예배받기를 원하신다. 그런 곳에서 예배와 찬송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다. 세상이 교회를 더욱 미워하는 그런 악한 사회에서 고통 받고 있을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바울은 이 편지를 썼고 에베소 같은 곳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주님의 편지이기도 하다.

찬송하는 이유

본문 시작을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한다. 이것은 시편에 "할렐루야"와 같은 의미이다.

우리가 찬송해야 하는 이유,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택하셨기 때문이다. (본문 4,5,9,11절)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으로 우리를 세상을 창조하기도 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셨고 마음에 두고 계셨다고 그것을 기뻐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다.(본문 7절) 짧은 한 절이지만 아주 강력한 말씀이다. 구약에서 죄 사함은 언제나 '피 흘림'의 대가로 이루어졌고 그 피 흘릴 제물은 흠이 없고 가장 값진 것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죄가 없는 사람은 없고 죄를 용서받기에는 이 세상의 제물은 너무나 부족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역사상의 모든 인류의 가치를 다 합쳐도 남고 넘치는 가치를 가지신 분, 동시에 죄 없는 인생을 사신 유일한 분, 그분의 피가 흘려짐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게 된 것이다. (히 10:10) 그리고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엡1:9) 때문에 우리는 찬송해야 한다.

'두란노'라는 학교

두란노는 사람 이름인데, 학자들은 대체로 학교의 주인이면서 선생이었을 것으로 본다. 두란노 학교는 당시의 신전이나 극장들처럼, 우상 숭배자들이 자신들의 신들을 위해서 땅을 고르고, 벽돌을 쌓아서 지어진 헬라식 건물이었고, 그 전까지만 해도 바로 그런 세상의 교육과 우상 숭배 만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그런 학교가 두란노라는 라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므로 인해 바울이 에베소에서 2년여 동안 매일 밤낮으로 강론을 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기르는 신학교가 됐을 것이다. 강론한다는 공중 설교를 뜻하기도 해서 이 건물은 학교가 뿐 아니라, 예배당이 된 것이다(행 19:10)

전 세계인이 모이고 금융과 문화와 우상숭배가 가득한 세계의 중심지인 뉴욕,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우리와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건물 "학교", 과연 이 학교는 하나님 눈에는 그냥 학교 건물일 수가 있을까? 우리가 이 에베소 같은 뉴욕에 있고 예배드리는 것이 과연 유연의 일치일 수가 있을까? 에베소의 두란노 학교처럼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통해 이 교회를 통해 예배 받기를 원하신다.

공감의 정서

누가복음 7:18-35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2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27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설교요약>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메시야 사역을 준비했던 사람이고 그가 예수님께 세례를 드릴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던 분이시다. 하지만 7장 19-20절에 보면 그가 옥에 있을 때 순간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회의를 품고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가 맞은 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에 예수님이 23절에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하신다. 그럼 요한의 믿음을 흔들리게 했던 원인은 무엇인가?

주님보다 앞서는 때

누가 복음 3장 16-17절에 보면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았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능력 있는 분이시며 또한 심판 때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고 심판하시는 주님이심을 알았다. 또한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어린양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를 흔들리게 했던 것은 시간이다. 그가 원하는 시간에 그가 원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이 움직이길 원했다.  

공감 정서의 부재

성자와 같은 삶을 살던 세례요한이 흔들렸던 이유는 자신의 생각이 예수님보다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공감정서의 부재이다. 이것은 사랑이 없고 정서가 메말랐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고 있는 일들이 맘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심판에 능력을 보여주지 않은 것에 대한 믿음의 회의였다. 하지만 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들의 약함을 체휼하신다고 했다. 함께 고통을 느끼는 정서가 바로 예수님의 성품인 것이다. 하나님의 그의 시간을 쫓고 함께 걸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공감의 정서를 부여 하신다. 그것은 곧 그들을 공감의 사람으로 준비시키자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으로 들어야 할 예수님의 음성

예수님의 눈에 화려한 요한

누가 복음 7장 24-26절에 보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요한은 극빈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외로운 곳에서 희생과 헌신으로 살았던 요한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이 보는 눈에서는 요한이 왕궁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보다 요한이 더 화려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보는 사람들의 시각을 바로 잡아 주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칭찬을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에 하신다. 이것은 그 뒤의 세대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함을 말씀해 주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높음을 위해 낮음을 선택한 삶

500년 전에 구약의 말라기와 이사야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서 예언되었다. 11절에 보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은 큰 사람이지만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하셨다. 세례요한은 구약과 율법과 선지자의 마지막을 대표하는 옛 언약에 속한 사람이지만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복을 받은 새 언약의 사람들이다. 즉 신약의 사람들은 오신 예수님을 보았고 그분을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낮추심으로 예수님의 크심을 들어내셨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예수께 주목 시켰고 사람들로 예수님을 주목하고 예배하고 사랑하게 했다. 우리의 삶에 주님이 보이지 않을 때 깊은 터널을 통과할 때 우리들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는 분의 음성과 주님을 향한 헌신과 사역을 사랑하시는 분의 음성을 들으려 하는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오실 때

누가복음 7:11-17
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노메드 영성

마태복음 8:19-23 | 예레미아 35:14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14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의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은 실행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의 명령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설교요약>

믿음의 절개를 지킨 영성
예레미야3:14에 따르면 노메드 레갑족속의 영성은 30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믿음의 절개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런 절개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셨다. 레갑의 노메드 영성은 예수님을 닮았다.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마귀로 부터 3번이나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타협하지 않으셨다. 그의 친 형제들은 그가 정말 위대한 분이시면 시골에 묻혀있지 말고 세상에 드러내라고 자극했다. 요한복음 7:4-5을 보면 그의 사랑하는 제자로 부터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유혹' 도 받았으나 타협하지 않으시고 꿋꿋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셨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유혹했으나 죄인들의 죄사함을 위해 인내하셨다.마태복음 27:42에 예수님이 받은 유혹은 십자가를 지지 말고 세상 영광과 쾌락을 즐기라는데로 모아진다. 짧은 인생 예수님을 위해 거룩한 고난을 받는것을 중단하고 스스로의 육신의 정욕을 채우라는데로 모아진다. 바울은 로마옥에 갖혀 있을때 이렇게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했다. 빌립보서 1:28-30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많은 사람과 상황을 통해 많은 은혜를 부어주신다. 그러나 그 은혜가 고난을 받게하기 위해 주신것임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말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한것은 한 영혼을 살리는 일이다. 한 영혼이 예수님 처럼 살도록 돕는것이다. 지옥의 고통속에 살아가는 자들에게 정신적, 육체적, 영적으로 도움을 주는 일이다. 예배자들이 되도록 돕는것이다. 나에게 준 은사와 가진것을 나누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면서 어려움을 격는 것이 고난이다. 이때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고난받는 것이 구원받은 증거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는 동일한 싸움이기에 이 세상 어디든 존재한다. 주님 만날때 까지 피할수 없는 일이다. 우린 고난을 피해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한 세상 어딜가도 동일한 싸움이 있다. 그것은 그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마귀가 여러가지 방법으로 공격해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레갑족속의 절개, 예수님의 절개를 가진 그분의 자녀의 삶을 모두 지켜보고 알고 계신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세상 정욕에 빠져 길을 잃은 자들을 깨우는데 사용하고 싶어하신다. 당신은 깨우는 사람인가? 깨워야 할 사람인가? 
무소유의 영성
노메드는 땅을 사지 않는다. 목초지를 따라 계절마다 이동하며 산다. 최소의 생활 용품을 가지고 다니는 거의 무소유의 삶에 가깝다. 이 명령을 300년이 흘러도 레갑자손들은 지켜오고 있었다. 예레미야 35:8-10에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8:20에 따르면 예수님은 바다위를 걸을수 있고 폭풍도 잠잠케 하시는 분이시다. 죽은자도 살릴수 있는 분이시다. 원하시면 무엇이든 하실수 있다. 온세상의 주인이시다. 그런분이 없어서 가난하게 된것이 아니라 가진것을 포기함으로 가난하게 되셨다. 체념을 무소유의 삶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체념은 가진것이 없지만 어떤것을 소유할 기회가 주어지면 움켜쥐는 삶이다. 그러나 무소유는 가질수 있지만 포기하는 것이다.다시 가질수 있는 기회가 와도 움켜쥐지 않고 나눔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체념이 아니라 무소유의 삶을 사셨다. 무소유의 삶을 사신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집중하시기 위함이셨다. 이 말씀 다음에 한 제자가 아버지를 장사하고 따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마태복음 8:21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태복음 8:22에 이것은 하나님 사역의 긴박성을 보여준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내주실때 한사람 한사람을 더 깊게 더 따뜻하게 사랑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오늘 아니면 내일하지가 아니라 긴박감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 누구든 오늘이 마지막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긴박감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것중에 하나가 '소유' 다. 가진 소유가 많아질수록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소유에 더 많은 관심과 관리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소유가 없다고 대답하게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마태복음 8:19을 보면 이때 예수님은 여우와 새를 비유하며 머리둘곳이 없다고 하셨다. 이것은 나를 따르려면 소유보다 사람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수있니? 라는 의미다. 그 다음 장사하고 따르게 해달라는 사람에게도 때로 혹독하게 대답하신것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무거운 소유가 될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도 소유가 아니고 사람이지 않는가? 라고 의문을 제기할수 있다. 예수님은 부모를 사랑하고 가족도 사랑했다. 십자가에 죽으면서도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의 사랑이 더 우선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우릴 보낼때가 있다. 순종하면 하나님이 놀라운 일들을 이루신다. 그러나 이때 내가 원하는 우선순위를 내세우며 그것을 먼저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사람이 소유로 우리의 내면에 자리잡으면 사랑이 아닌 도피처가 된다. 우상이 된다. 우상은 우리의 내면에 하나님의 사랑을 흘러가지 못하게 한다.따라서 무소유의 삶은 우선순위다.영적인 민첩성과 무소유의 삶은 연결되어 있다. 영적으로 민첩할수록 더 무소유의 삶을 살게되고 무소유의 삶을 살게 될수록 영적으로 민감해진다. 하나님이 소유를 계속해서 부어주시면 어떻게 하나? 라고 반문할수 있다. 민첩하게 흘려보내라. 사용하라. 그러면 썩지 않을것이다. 그러면 영적인 지방이 되지 않고 근육이 될것이다. 
당신은 무소유의 영성이 있는가? 
상급 
예레미야 35:18-19을 보면 하나님의 상급도 특별하다. 이세상의 상급과 다르다. 레갑의 자손에서 하나님을 섬길 사랑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하실것을 상급으로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탄생부터 죽음 부활까지 한결같이 신선한 향유처럼 순수했다.하나님을 향한 사랑 사람을 향한 사랑이 열정이 불탔다. 이것이 하나님의 상급이다.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계속되고 순수함을 잃지 않고 열정의 불이 계속 타오르는 것은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하는 일이다. 주님이 은혜를 부어 주셔야만 계속 탈수있고 태울수 있고 녹일수 있다. 
주님은 오늘도 노메드의 영성을 가진 사람을 찾고 계신다. 

응답해 주고 싶은 믿음

누가복음 7:1~10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쌔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설교요약>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가버나움에 있던 로마의 백부장이 그의 종을 살려달라고 예수님을 초청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고 크게 놀라셨고 그의 소원을 들어 주셨다. 그럼 예수님을 놀라게 한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는가 보자?

사랑의 믿음: 노예는 그의 생명이 주인께 달렸다. 그런 노예가 죽을 병이 들었다.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백부장이  그 종을 사랑했다고 기록했다. (2절) 따라서 사랑과 믿음은 비례함을 알수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가 간구하게 된다. 따라서 믿음이 성장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전과 다르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사랑하는 믿음을 보시고 그 종의 병을 고쳐 주셨다. 그럼 우리의 기도가 사랑의 기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수 있는가? 첫째.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면 사랑의 기도다. 둘째. 누군가를 위해 불가능한 기도를 하고 있다면 우리안에 사랑이 있다는 증거다. 그럼 이런 인격과 사랑의 음은 어디서 부터 흘러나오는 것인가?

예수님의 가치를 아는 믿음: 백부장은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할 자격도 자신의 집에 모실만한 동등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했다. 그래서 집에 까지 오시는 수고를 하시지 않게 하기 위해 무리를 예수님께 급히 보냈다. 백부장은 그동안 유대인들에게 회당도 지어주고 자신의 민족도 아니고 자신들의 식민통치를 받는 유대인을 섬기고 사랑했다. 사람들이 가치있게 여기지 않는 노예를 사랑하고 존귀하게 대해 주었다. 그럼에도 그런 자신이 행한 선한 일의 가치와 예수님을 감히 비교 할수도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백부장은 어떻게 예수님의 소문만을 듣고 이런 믿음을 보일수 있었을까? 요한복음 6장 37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백부장을 감동해 예수님께 나오도록  이끌어 주셨기 때문임을 알수있다. 백부장의 이런 아름다운 사랑과 인격은 자신을 부인할때 하나님이 부어주신 영적인 축복이었다. 그럼 자신을 부인하며 사는지 시인하며 사는지 어떻게 알수있을까?  

말씀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가? : 7-8절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말씀 하시는 예수님을 믿었다. 그러나 오늘도 그 말씀을 통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기다리는 사람은 드물다. 예수님이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본것은 자신의 모든 생각대로 예수님을 움직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주인에게 명령을 받으려는 종의 상태로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반응할수 있었던 것은 그는 삶속에서 종들의 헌신과 순종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자신이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하나님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영적으로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매순간 순간 어디있든 어떤일을 하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고 그분과의 친밀감속에서 임재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기대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납득되지 않는 명령에도 순종하는가? : 오늘날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납득할수 있는 것 이해가 되는 것만 명령하시길 기대한다. 또한 납득이 되어야만 어떤 일을 시행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가고 있는것 같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가능한 것만 순종하려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경우 분명 납득되지 않는 일을 하게 하셨다. 이런 일을 하려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어야 가능하다. '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다. 그분은 완벽하신 분이시다. 말씀하시면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에게는 어떤 불가능도 어려운 것도 없으시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할수 있으려면 그분을 믿지 못하면 불가능 하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만큼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부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