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속에서 들려온 음성

사도행전 27:1-44
1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러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14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23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27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 저리 쫓겨 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와지는 줄을 짐작하고 
28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33 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34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 칠십 륙인이러라 
38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39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40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41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가니 
42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설교요약>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이탈리아로 가는 배에 오르게 되었고, 후송 책임자인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이 비록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배에서 동역자와 함께 할 수 있게 자유를 허락해 준다. 가이사랴를 출발한 배는 무라에 정착을 하고, 탑승자들은 무역선인 알렉산드리아 배로 환승을 한 후, 그 배는 다시 니도를 거쳐 그레데 섬 남쪽에 있는 미항에 도착하게 된다. 당시 심한 기상 상황으로 인해 바울은 항해를 중단할 것을 권면했지만,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은 백부장은 항해를 강행한다. 물론 전문가의 견해에 더욱 신뢰를 가진 것도 있겠지만, 배에 실은 곡물을 조속히 운송해야 경제적 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다는 이유도 백부장의 결정에 기여를 하지 않았나는 해석도 나온다. 결국 허리케인의 여파로 배의 짐을 모두 바다에 던져 버리고, 모든 이들이 삶을 포기하는 시점에까지 이르게 된다. 바로 그 때 바울은 하나님께 들은 네 가지를 담대하게 선포하는데, 첫 째는 배만 잃게 될 것이고, 둘 째는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는다는 것, 셋 째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바울에게 맡겨주셨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이들이 한 섬에 무사히 도착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주목할 점은 바울을 제외한 배 안에 모든 사람이 살기를 포기한 그 날 밤 바로 그 때 바울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것을 담대히 선포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바울과 그렇지 못했던 나머지는 어떻게 달리 반응했는 지 그 차이를 비교해 보자.

첫 번째, 배가 풍랑에 표류하자 선원들은 자신들만 살려고 구명 보트를 띄워 도주하려는 집단 이기주의에 빠진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모든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워 질 수 있기에 바울은 이를 백부장에게 알려 그들의 도피를 막았다. 이렇듯 우리 삶 속에 파도와 고난이 우릴 연단시키고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릴 더 탐욕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만들 수 있다. 즉, 삶의 파도가 우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파도 속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이 우리를 바꾸는 것이다.

두 번째, 14일 이라는 기간 동안 함께 동고동락하며 나름 정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수들이 도망을 쳐 본인들이 난처하게 될 상황을 두려워한 병사들은 죄수들을 살륙하고자 하는 무정함과 냉정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반면에, 바울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목격하며 마음이 녹아져 내린 백부장은 병사들을 저지하고 모든 이들이 다 살 수 있도록 진두지휘한다. 즉, 관계를 맺는데 있어 함께한 세월보다 그 관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성품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어떻게 끝까지 사랑하실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의 능력 아래에 두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 능력 아래 두신 것이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폭풍 속에서도 내 마음이 잔잔해지고 평안해진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과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아셨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급하심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내가 속한 곳은 유한하기에 지금 속한 곳에서 더 사랑하고 더 주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우리는 삶의 파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한 주 동안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 음성에 순종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 묵상하고, 적용해보자.

불의한 사람들에 둘러싸였을 때

사도행전 25:1-12, 26:32
1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4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5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6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7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8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설교요약>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집요한 영적 공격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 더 헌신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향력이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가? 우리는 종종 삶에서 불의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불의한 사람들은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며, 약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불의한 상사나 동료나 무리들을 만날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의 성경적 반응
첫째. 하나님의 빛과 진리가 앞서 가도록 기도하며 살아라
시편 43장 기자는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의 결정보다 주님의 빛과 진리를 먼저 보내달라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께 먼저 간구하면 주님께서 자신의 상황을 억울하게 하는 거짓과 어둠이 드러날 빛과 진리를 보내주시리라 믿었다. 하나님께서 빛과 진리를 보내주시면, 그 안에서 치유가 일어나고, 슬픔과 절망은 기쁨과 평안으로 바뀐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으로 빛과 진리를 보내실 이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바울도 빛과 진리에 권세와 힘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항상 정직하며, 거짓 없이 빛 가운데서 말하고 행동했다. 빛과 소금 같은 삶은 언어와 연결되어 있다. 진실과 거룩, 정직의 말들은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바꾸어 간다. 말과 소금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은혜의 대화를 위해 ‘seasoned with salt’ 를 하라고 한다. 그 이유는 첫째, 고기를 맛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시즌닝은 먹는 사람의 기쁨을 위해서 한다. 즉 대화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할 때 시즌닝이 된다. 그런 시즌닝이 있는 대화는 지치고 피곤하고 기진맥진한 사람에게 영양분을 공급한다.
둘째는, 말에는 균형과 절제가 있어야 한다. 서로 너무 좋다고, 너무 많이 말을 하거나, 혹은 경계하면서 너무 적게 하면 대화의 진실을 잃을 수 있다. 셋째는 균형 잡힌 시즌닝은 상대방에게 꼭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영감과 지혜를 준다. 그래서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라고 말씀했다. 시즌닝 대화는 계속해서 대화 중에 성령의 기름 부음과 인도를 받게 한다. 우리가 불의한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도 또한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도 시즌닝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빛과 진리가 어둠을 몰아내고 영혼들을 풀어주는 소금과 빛의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자기 자신과도 시즌닝 대화를 해야 한다. 정직하게 빛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고백하는 기도를 할 때 어둠과 거짓은 힘을 잃는다. 내면은 고요하고 평안해 진다. 소금으로 빛으로 살수 있는 능력을 준다. 당신의 삶에서 빛과 진리가 당신보다 앞서가도록 기도하고 있는가?

둘째. 불의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응답할 수 있음을 기대하라
베스도는 가이사로 보내달라는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로마를 간다는 것은 그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2년이 지난 후에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 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 23:11). 바울이 법정에 서서 재판 받는 모습이 계속 반복되는 23-26장은 사도행전에서 가장 재미없는 부분 같지만 이것은 바울을 위해 하나님이 만들어준 무대였다. 구금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바울에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지도자와 로마의 최고 권력자들이 보는 앞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주셨다. 때때로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신 상황들을 불평하고 그 의미를 모르고 답답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당하는 어려운 일들을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볼 수 있는 상황들이 종종 있다. 또한 그 동안 함께했던 동료들과 삶을 나눌 때에도 어려움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무엇을 믿고 어떤 삶들을 살았는지 나눌 기회도 주신다. 또한 때가 되면 하나님은 힘들게 하는 권력자들이나 주변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이끄시고 옮기신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이 현실이 되게 하신다. 길을 여시고 그분의 빛과 진리가 앞서가게 하신다.

이사야 41장 17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다.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목이 마르고 혀가 마르는 자들에게 응답하신다. 당신은 하나님을 이렇게 목말라 하는가? 바울은 하나님이 2년1개월 전에 하신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재치 있게 가이사에게 재판 받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해 사모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사모함이 있는가?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다.

 

믿음과 공감의 차이

사도행전 24:1-27
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2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하옵나이다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6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7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8 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10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11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지 열 이틀 밖에 못되었고 12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13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17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 
20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21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 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3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24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27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설교요약>

오늘도 하나님께 나가긴 하지만 마음 문을 두드리는 주님께 삶을 온전히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때론 스스로 자원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을 깊숙이 만지시려 할때 벨릭스처럼 '그만하면 되었으니 가시오' 라며 발을 빼는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자원하며 나오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 하실때 마음을 여는 것이다. 윌리암 홀맨 헌트(1827~1910) 라는 영국화가가 1853년에 완성한 ' 세상의 빛' 이란 작품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예수님의 표정이 어둡고 예수님이 들고 계신 등불에서만 빛이 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왜 문에 손잡이가 없는가 물었다고 한다. 이 질문에 화가는 '마음의 문은 그 자신이 안에서 열어야만 한다는 걸 표현한 것이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그림을 잘 보면 문 앞에 엉겅퀴가 잔뜩 자라나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연상하며 그림을 그렸다.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이미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영혼은 냉냉해졌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해졌다.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뜨겁든지 차든지 열정을 다시 회복하라고 하셨다. 그렇치 않으면 그들을 토해 버리시겠다고 하셨
다. 작가 윌리엄 홀맨 헌트는 이 그림을 통하여 믿는 사람의 영혼도 다시 닫힐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마음에 엉겅퀴가 자라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또한 밖에서 열수 있는 손잡이를 그리지 않음으로 안에서만 그 문을 열 수 있음을 표현했다.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30) 라고 말씀하셨다.

열린 마음문의 특징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열고 받아 들인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원해서 들으면서도 벨릭스나 드루실라처럼 터치는 되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믿지 못하는 것이다. 공감은 하는데 믿지는 못하는 것이다. 종종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공감' 과 '믿음'을 혼동할 때가 있다. 믿음은 말씀을 받을때 이성과 감정의 동의 속에서 행동으로 옮겨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믿음은 물리적이고 감성적인 것을 초월해 어떤 불가능한 것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도 하나님을 믿기에 아멘하며 마음문을 열게 된다. 믿음은 사물이 아니라 인격이신 하나님을 믿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어떤 불가능하고 막막한 상황을 만나도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잃지 않는다. 공감과 이성을 뛰어넘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둘째. 감정을 넘어 사실을 신뢰한다. 우리는 사실을 의지하지 않고 감정을 신뢰할 때 요동함이 있다. 당신이 예민해 하는 감정은 무
엇인가?
돈, 명예, 좋은 직장, 성공, 보여주는 것, 원수들의 엿봄, 이성, 결혼,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집착, 외모, 신발, 자동차, 옷, 보석, 지식, 비교 받는 것, 당신의 어떤 재능, 취미생활..등 이 중에 특별히 예민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냥 놔둘때 하나님과 당신의 교제는 점점 멀어지고 당신은 더 곤고해 질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사실로 돌아가야 한다. 다윗은 감정의 고백과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하나님의 사랑의 사실을 알았다. 다윗의 시는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글을 쓴 증거다. 감정을 하나님 앞에서 적어 보는것이 중요하다. 사실을 신뢰하라. 주님의 당신을 향한 사랑은 영원하며, 구원은 변함없고, 그분의 선하심은 영원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감정의 상자에 갇혀 실제를 보지 못하고 슬픔과 근심 속에 살아가는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데려가시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보내신 그의 최고의 선물이고 실제인 비둘기는 '성경과 성령' 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감하는데 그치는가? 아니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가? 만약 믿어지면 당신은 감정과 이성의 상자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다.

나누어야 할 고통

사도행전 23:14-35
14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15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16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17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이르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18 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이르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19 천부장이 그의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20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21 당신은 그들의 청함을 따르지 마옵소서 그들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니
22 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알렸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23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24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25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26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27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28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29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30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31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32 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가니라
33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34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35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설교요약>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계획했던 바울의 암살이 바울의 생질을 통해서 알게 되고 바울은 바로 백부장과 천부장을 통해서 총독이 있던 가이사랴로 안전하게 호송된다. 놀라운 것은 바울을 호송하기 위해서 군인 470명이 호위하게 된다. 하나님은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삶을 오늘도 이렇게 지키신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어려움과 방해가 닥쳐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시편 23장 5절에 보면 주님은 특별히 원수가 우리를 삼키려 하고 공격하려 할때 우리에게 기름 부으시는분 이시다. 즉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시며 기름부음을 통해서 원수를 분별하고 싸울 수 있는 힘을 제공하신다. 다시 말해서 기름부음은 나를 노리는 원수를 보고 두려워하는것이 아니라 내 영혼에 성령을 부어주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을 보게 한다.

바울이 높은 위치에 있던 백부장을 부를때 그가 즉시 달려온것으로 추측해 보면 그가 처한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을 존중하고 겸손하게 권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을 보여준다. 또한 사도행전 23 장6절에 바울의 암살계획을 알려준 생질은 본인의 목숨을 걸고 바울에게 이 모든 과정들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주를 위해 살때 그때그때마다 충성되고 신실한 사람들을 일으켜 우리를 돕게 하신다. 그때 우리는 바울처럼 그런 사람들의 도움과 충성스러움을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로마서 8장 17절에 share란 단어를 보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가진 좋은것과 귀한것을 나누는것과 또한 힘들고 무거운 짐도 함께 나누는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나눔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다시 쓸 수 있다. 기쁨도 나눌 수 있고 고통도 나눌 수 있다. 공통점은 사랑이있어야만 가능하다.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의 고통' 을 나누는 자라고 한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2천년 전에 고통을 모두 받으시고 끝내셨다. 바울이 이 글을 쓸때는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25년이 지난 시기인데도 바울은 예수님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 그분의 자녀가 그 고통을 나누어져야 한다고 한다. 그럼 이미 십자가에서 고통을 끝낸 예수님의 고통은 무엇일까?

천부장에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암살계획을 알린 청년은 '예수님의 고통'을 나눈 사람이다. 그는 지금도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의 영광'을 누리고 있을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예수님의 고통'을 나눌 사람을 찾고 계신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영광' 을 나누는데 관심이 있다. 칭찬받고 주목받고 대접하는일은 기꺼히 자신도 끼고 싶어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통을 나누는데는 인기가 없다.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의 고통을 나누는 눈에 띄지 않는 이 시대의 예수같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들의고통이 나누어 져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기꺼이 나누어 주신다. 당신이 나누어 져야할 예수님의 고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복을 채우는 사람들

시편 1:1-3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설교요약>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우리는 현재 상황들이 복인지 화인지 구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이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예로 요셉이 형제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되지만 그는 후에 이집트에 총리가 되는 대 반전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복으로 여겨지는 일들이 화가 되고, 화로 여겨지는 일들이 복이 된다면 과연 무엇이 진정한 복 일 수 있을까? 

진정한 복은 시간과 상황에 상관 없이 항상 이루어 지는 복이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과 영생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진정한 복은 예수님 이시다.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즉 선으로 이뤄진 다라고 믿는 것이 바로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다 복이 있는 자들인데 왜 그 복을 누리지 못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삶들이 아름다운 결론 임을 담대히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좋은 감정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결코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성을 나타내는 악한 감정들을 거부하기 위해서 좋은 감정까지 없애 버리는 속임에 빠지면 안된다.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은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강한 감정의 회복 없이는 복된 삶을 누리지 못한다. 

1절에 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시냇가에 나무처럼 살지 못하는 이유는 악인들의 삶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먼저, 오만한 자들은 바로 교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겉으로 겸손해 보이고 말투가 겸손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일들에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는 자가 교만한 사람이다. 그리고 죄인들의 길에 서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 두가지 속성은 쉽게 분별할 수 있지만 악인의 꾀를 따르는 사람은 구별하기 힘들다. 꾀를 부리는 것이 세상적으로 볼 때 지혜로운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꾀를 부리는 영역이 많아질수록 본인의 유익과 기쁨이지 하나님의 빛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 20절에 보면 악인들은 그의 행위가 드러날 까봐 빛을 미워한다고 한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지만 율법에서 벗어나지 않은 부분에서 꾀를 부리며 이윤들을 챙겼던 위선자들이었다. 혹시 우리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악인의 꾀를 따르는 삶이 아닌 것인지 확인 볼 필요가 있다. 

2절에 보면 ‘묵상하다” 라는 단어에는 선포하다, 주장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한 단어에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데 묵상은 혼자서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선포는 바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소리 내는 것이다. 또한 ‘주야로” 는 하루 종일을 의미하는데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면을 채우고 그것이 내 말과 행동으로 삶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이 바로 복이 있는 사람이다. 

복이 있는 사람은 단지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나무 잎이 마르지 않고 늘 푸른 사람이다. 또한 복을 꽃 피우고 그 향기를 뿜어내고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 시대에 예수님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