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채우는 사람들

시편 1:1-3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설교요약>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우리는 현재 상황들이 복인지 화인지 구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이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예로 요셉이 형제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되지만 그는 후에 이집트에 총리가 되는 대 반전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복으로 여겨지는 일들이 화가 되고, 화로 여겨지는 일들이 복이 된다면 과연 무엇이 진정한 복 일 수 있을까? 

진정한 복은 시간과 상황에 상관 없이 항상 이루어 지는 복이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과 영생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진정한 복은 예수님 이시다.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즉 선으로 이뤄진 다라고 믿는 것이 바로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다 복이 있는 자들인데 왜 그 복을 누리지 못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삶들이 아름다운 결론 임을 담대히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좋은 감정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결코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성을 나타내는 악한 감정들을 거부하기 위해서 좋은 감정까지 없애 버리는 속임에 빠지면 안된다.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은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강한 감정의 회복 없이는 복된 삶을 누리지 못한다. 

1절에 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시냇가에 나무처럼 살지 못하는 이유는 악인들의 삶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먼저, 오만한 자들은 바로 교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겉으로 겸손해 보이고 말투가 겸손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일들에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는 자가 교만한 사람이다. 그리고 죄인들의 길에 서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 두가지 속성은 쉽게 분별할 수 있지만 악인의 꾀를 따르는 사람은 구별하기 힘들다. 꾀를 부리는 것이 세상적으로 볼 때 지혜로운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꾀를 부리는 영역이 많아질수록 본인의 유익과 기쁨이지 하나님의 빛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 20절에 보면 악인들은 그의 행위가 드러날 까봐 빛을 미워한다고 한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지만 율법에서 벗어나지 않은 부분에서 꾀를 부리며 이윤들을 챙겼던 위선자들이었다. 혹시 우리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악인의 꾀를 따르는 삶이 아닌 것인지 확인 볼 필요가 있다. 

2절에 보면 ‘묵상하다” 라는 단어에는 선포하다, 주장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한 단어에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데 묵상은 혼자서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선포는 바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소리 내는 것이다. 또한 ‘주야로” 는 하루 종일을 의미하는데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면을 채우고 그것이 내 말과 행동으로 삶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이 바로 복이 있는 사람이다. 

복이 있는 사람은 단지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나무 잎이 마르지 않고 늘 푸른 사람이다. 또한 복을 꽃 피우고 그 향기를 뿜어내고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 시대에 예수님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