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과 사모함

누가복음 4:14-37
14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설교요약>
그리스도인이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는 첫째, 승리 후에 더 깊은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사적인 영광”을 모르기 때문이고 둘째, 승리한 자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공적인 영광”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적인 영광
저자 요한의 청년 때의 믿음을 가장 성숙한 위치에 두고있다. 청년 믿음은 먼저 싸워서 강해진 믿음이다. 전쟁에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실전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 보다 더 강하고 담대하다. 청년 믿음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내면에 거하고 있다. 늘 죄사함 받는 것에 머물러 있는 어린아이의 믿음에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 아비의 믿음으로 나가야 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는데 정작 영적인 공격이나 분별력은 점점 떨어져 어둠과 유혹에 잘 속는 노쇠해 지는 아비의 믿음에 머물러 있지 않아야 한다. 이것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흉악한 사단을 분별하고 파괴하며 하나님의 임재와 생명이 어둠의 영혼과 세상 가운데 흘러가게 하는 통로가 되는 청년의 영성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아이의 믿음에서 아비의 믿음으로 아비의 믿음에서 청년의 믿음으로 계속 성숙해 가면 더 큰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청년의 믿음을 가지고 사단의 유혹과 공격을 향해 싸워가다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내면 안에서 온전해 진다. 온전 하다는 것은 그 사랑이 더 깊어지고 더 예수님 같은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우리 안에서 사단의 유혹을 대적하고 죄와 싸워 이기면 이길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우리 안에서 더욱 커지고 그 사랑은 두려움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이런 모든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영적 싸움을 그치거나 포기하지 청년의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어진다. 

공적인 영광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오셨고 가장 먼저 회당에 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회당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시기에 짐승으로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없어 성경 봉독과 강해 및 기도, 그리고 축도로 예배를 드리는 데에서 유래했다. 저자 누가는 예수님이 들어간 회당을 두 지역, 나사렛  회당 사람들과 가버나움의 회당 사람들을 비교하며 소개한다. 나사렛 회당의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거절하고 무시하는 강퍅한 마음을 가졌고,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았으나, 그분의 외적인 출신성분 때문에 거절했다. 그리고 심지어 화가 나서 그 동네 산 낭떠러지로 끌고가 밀쳐 죽이려고 했다. 예수님은 나사렛의 갇히고, 눌리고, 보지 못하고 가난한  영혼들을 살려 주시려고 그곳에 가셨는데 단 한사람도 그런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했다. 반면, 가버나움 회당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모했고,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였고, 예수님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골방의 불은 사방으로 퍼진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혼자였지만 그 광야의 불이 가버나움으로 흘러왔다. 우리의 기도와 예배는 화려하지 않고 소수만이 모일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모임이 성령에 붙들렸다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런 모임들은 또 다른 영혼들을 살리고 회복시키고 일으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 되리라'(눅10:3) 광야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광야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면 외로운 모임, 작은 모임이라 할지라도 그 불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곳으로 퍼져 나간다. 하나님은 오늘도 가버나움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그들에게 놀라운 축복들을 부어 주시고 또 부어 주신다. 그 불은 또 다른 곳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당신은 거절 하는가? 사모하는가?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1부> | 은혜 받는 감람나무<2부>

<1부 - 배현석 전도사님>
마가복음 5:1-20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2부- 양정상 목사님>
나훔 1:9-15
9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0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13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14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설교 요약>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었다. 나훔은 남 유다 요시야 왕 때 선지자였다. 요시아는 8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우상을 버리고 성경을 정리하는 종교 개혁을 통해 남 유다 를 하나님이 기뻐하는 나라로 회복 시켰다.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남 유다도 두 번이나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이 당시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였으며, 남 유다의 히스가야는 하나님이 기뻐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히스가야가 우상과 산당을 없애는 것을 보고 앗수르 왕은 히스가야가 마치 자기 신을 부순다고 여기며 비웃었다. 그러나 3천년 동안 강국이던 앗수르는 작은 남 유다를 결코 함락하지 못했다.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인들이 서로를 해치도록 교란시키시어 185,000명이나 죽이셨기 때문이였다. 나훔서 3:17의 기록처럼 앗수르는 1845년 발굴 전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던 나라였다. 또한 나훔의 예언대로 그 시대 최강국이던 앗수르에 대한 심판이 성취되었으며, 이 일은 억압받던 남 유다에게는 구원이 되었다. 곧 앗수르의 멸망은 남 유다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되었다.

 바울 또한 로마서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죄와 사단으로부터 건지고 사망에서 해방시키심을 아름다운 소식이라 일컬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단을 심판하시며 우리를 구원함에 있다. 하나님의 성품엔 공의와 사랑(은혜)이 공존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 받았기에 그 분의 공의를 실감하지 못한다.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지불한 대가에도 공감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은혜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 분의 이끄심을 바라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오늘도 십자가에 못밖힌 손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기뻐하시기 위해 노크하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선과 의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갈 수 없는 이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 오셨다. 세상 사람들은 구원을 원치 않으나 죄인이기에 구원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참 감람나무에 접붙인 돌 감람나무의 비유를 통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즉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이 구원 받은 일을 가지고 구원 받은 유대인들과 은혜를 저버린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우선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교만해선 안된다고 경고했다. 교만한 불신 유대인도 벌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이방인 그리스도의 교만은 더욱 가차 없이 벌하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였다. 여기서 심판 받은 앗수르가 누구인지 되짚어 보자. 앗수르는 노아의 아들 함의 자손인 니므롯의 후예들이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괴롭혔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앗수르의 조상 함은 노아와 함께 방주 속에 있었다. 앗수르가 만약 나의 가족이라면 앗수르의 심판이 당연하게 느껴질까? 아니다 그들이 우리의 가족이라면 우리의 기도는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바울이 참 감람나무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인 비유를 들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팔레스타인 농사법에 관한 옛 문서를 보면 이렇게 접붙임을 하는 이유는 돌 감람나무에서 열매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열매 못매는 참 감람나무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이면 생기 잃은 참 감람나무가 다시 살아난다고 한다. 즉, 이방인을 하나님 백성으로 살릴 뿐 아니라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도 함께 살리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말한 것이다. 탕자의 이야기에서도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를 용서하고 사랑했다. 그 모습에 불평하는 탕자 형도 본인이 늘 성실하다는 교만을 버리고 탕자와 행복하게 살기를 아버지는 바랬을 것이다. 우리도 원래 탕자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탕자 형이 된 사람이다. 우리가 행하고 섬긴 것에 대해 탕자에게 자랑하고 교만할 것도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참 감람 나무 같은가? 돌 감람 나무인가? 답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참 감람나무가 되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선택받을 수 밖에 없는 특별함이 이스라엘 백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뿌리 내리고 있었기에 참 감람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도 앗수르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옮기시어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 감람나무가 된 것도 은혜이다. 바울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주의해야 할 두 가지도 살펴보자. 첫째, 특권의식이다. 둘째, 은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영혼들로 인해 주시는 은혜를 찾자. 그 영혼들이 열매 없는 우리를 깨울 것이며 우리가 있었던 구원의 은혜를 회복시킬 것이다.

꼭대기에서 안으로

누가복음 4:9-13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설교요약>
마귀의 세 번째 유혹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시편 91장 11-12절 말씀을 인용해서 그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리라고 유혹한다. 왜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것일까? 민수기 10장 11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인도한 불과 구름기둥이 증거의 성막위에 있었다. 그 증거의 성막은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를 의미하는데 마귀가 예수님을 세운 성전 꼭대기가 바로 불과 구름기둥이 임재했던 위치와 같다. 즉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이스라엘의 주인이신 그분의 능력의 근원지에 예수님을 세운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 세운 이유
첫째는 십자가의 조건없는 사랑을 짓밟고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왕의 자녀의 권세를 파괴하기 위함이다. 거짓의 본체인 사단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진실한 관계와 교제를 끊기 위해서사랑의 확인이라는 전략을 시도한다. 또한 사단은 시편 91장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매개체로 오인하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조건적인 사랑을 하도록유도한다. 사실 사람들도 깊은 성숙에 들어가면 조건이 무의미해지는데 허물러 하나님이 우리들을 향한 사랑은 절대로 조건이 성립이 안 된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만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속죄를 위한 복잡한 번제의 과정과 몇 번에 걸쳐 옷을 갈아입고 몸을 씻고 거룩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거룩하게 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보여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덮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를 수있게 해주는 완벽한 거룩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은 조건이 성립될 수 없다. 십자가에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우리의 죄를 덮어 주셔서 그분의 임재 앞으로 나오게 해주신 것은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이다. 그런데 사단은 이런 지성소, 즉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짓밟고 서서 다른 사랑의 조건을 계속해서 제시하라고 한다.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성취한 것이 자신이 하나님에게 가치 있고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여기게 유혹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할 능력을 분산시킨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이 광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배웠다. 성령님이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신 목적은 마귀의 유혹을 받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에 집중하면서 곧 시작될 3년 반의 공생애를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마귀는 마지막 시험으로 예수님이 가진 능력과 열정을 헛된 것으로 만들라고 했다. 즉 자신만이 가장 거룩하고 가장 영적이고 가장 신령한 존재임을 알리는데 관심을 두게 해서 예수님의 능력을 탐욕의 도구로 전락시키려 했다. 그럼 예수님이 어떻게 마귀를 이기셨는지 보자.

예수님의 승리의 방법
첫째는 결핍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자.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6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신다. 이 말씀 속에는 매 순간 출애굽기처럼 응답-결핍-응답-결핍-응답-결핍이 계속 반복될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되 한 번으로 그치지 말고 계속 신뢰하라는 의미가 있다. 

둘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고 성전 꼭대기로 올라가지 마라. 사단은 성전 꼭대기에 선 사람들, 즉 높은 마음, 자신이 가장 영적이라고 우월한 마음을 갖도록 유혹한다. 이런 마음이 들면 '사단아 물러가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선포해야 한다. 성전은 안으로 들어가는 곳이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곳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매 순간 인정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들의 예배와 사랑을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 진심의 예배와 사랑을 드릴 때 그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조건 없는 사랑, 완벽한 기쁨, 평안이 임해 영화롭게 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의 길을 가게 한다. 누군가를 섬기고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것을 고난이라고 하시지 않고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라고 '영광'이라고 하셨다. 그런 고난은 부활이 있고 열매가 있고 생명이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난다. 당신은 성전 꼭대기를 향하는가? 성전 안을 향하는가?

예배 전쟁

누가복음 4:5-8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

<설교 요약>
광야로 이끈 두번째 이유 -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해
마귀가 두번째 예수님을 유혹한 것은 자신에게 절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절하다' 라는 동사는 '~을 향하여 입맞추다, 경배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다'라고 할 때 사용되는 언어다. 사단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를 자신에게 하라고 유혹한다. 그 미끼로 세상 영광과 권력을 모두 주겠다고 유혹했다. 이것을 사단은 다시 한번 자신도 모르게 네 가지를 인정한 셈이다. 첫째.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들의 예배를 받으신다. 세째. 예배에는 놀라운 축복이 숨겨져 있다. 넷째.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를 자신에게 하기 원한다. 이 시점은 예수님이 3 년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려는 시점이다. 예수님은 저물 때 모든 사람이 집으로 돌아갈 때도 홀로 감람산으로 가셨다. 요한복음 7:53-8:1에 따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저녁이 되어 제자들을 배에 태우어 보내신 후 홀로 산으로 가셨다. 마가복음 6:46에 따르면 새벽에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마가복음 1:35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주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이셨었고, 기본적으로 열 두 명의 제자의 늘 함께 하는 삶을 사셨다. 그러나 그런 삶 속에서도 홀로 어디론가 가곤 하셔서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찾아야만 했다. 혼자있는 것은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홀로 있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8:29을 보면 예수님은 삼 년간에 공생애 동안 제자를 훈련하고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시고 병든자를 고치고 귀신 들린자 들을 자유케 해주시는 사역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께 엎드리는 시간 그분께 예배하는 시간만큼은 어떠한 것과도 타협하지 않으셨다.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애타게 찾을 때도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러 떠나셨다. 요한계시록 22:5에 따르면 하나님의 임재가 단절된 곳에는 영원한 고통, 절망, 지루함, 그리고 슬픔만이 존재한다. 시간이 아닌 사단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에는 아직 시간도 존재하고 하나님의 임재도 존재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와 그 분과의 깊은 예배가 깊어질수록 우리 삶의 시간속에서 지루함도 외로움도 점점 작아지고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분과의 교제가 단절 될수록 시간 안에 있는 아픔과 고통과 절망과 슬픔과 외로움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가 흐르는 예배는 이땅의 시간 안에서 천국을 살게 하는 힘의 원천이고 생수의 근원이다. 아무것도 아닌데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그 시간에는 기쁨과 치유와 회복과 자유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가 없는 곳에는 사단이 지배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예배가 건강하고 살아있을 때 그들은 매순간 삶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임재를 경험한다. 그러나 예배의 태줄이 끊어지면 내면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해간다. 당신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온전히 드리고 있는가? 예배드리는 것을 다른것과 타협하지 않고 있는가?

마귀의 유혹 - 예배 안에 있는 축복들을 받지 못하도록
마귀는 예수님의 예배를 파괴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렇게 단계별로 유혹했다. 순식간에 예수님을 데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여주었다. 세계의 나라의 왕국에는 부귀와 권력과 영화가 모두 있다. 한 나라의 왕은 뭐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한다. 누가복음 4:6과 요한복음 3:35 말씀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던 공생애 초기에 한 말씀이다. '주셨다' 라는 동사가 현재 완료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미 예수님에게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권위를 모두 예수님에게 주심을 알 수있다.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아들의 것이기도 하다. 잠언 8:27 에는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잠언8:29-30에는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알수 있다. 한 나라의 왕국은 하늘과 땅, 바다와 태양과 자연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왕국의 주인도 하나님이시고 예수님 이시다. 그러므로 마귀의 이 거짓말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농토를 가진 주인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와 그 주인의 농토를 보여 주면서 당신이 나에게 잘만 보이면 내가 이 농토를 당신에게 주겠다' 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귀의 조그마한 유혹에도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린다. 거짓말에도 잘 속아 넘어간다. 세상의 영광과 권력에 취하고 유혹에 점점 무릎 꿇을 때 나타나는 두드러지는 증상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세상의 영광과 권력의 달콤함의 유혹이 너무 강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권력과 영광과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이 땅의 주권을 넘겨준 일이 없으시다. 스스로 자신의 것이라고 거짓말 한다. 자신이 하나님인양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협박도 하고 달래기도 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세상 정욕과 유혹에 넘어지고 변질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도 자신의 영달과 야망을 위해서는 단숨에 포기한다.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사단에게 팔려고 한다.

마태복음 6:25, 31-34 말씀은 무엇인가? 하늘과 땅의 주인은 마귀도 아니고 우리 자신도 아니고 우리의 육신의 부모나 권력이나 재력의 빽도 아니다. 바로 하나님 이시다 라고 말씀하신다. 막상 예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희생시켜 돈을 벌고 직장에 들어가고 출세를 한다해도 우리는 우리 힘으로 지혜로 안되는 일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때 누가 우리를 이런 정신적이고 육체적이고 영적인 총체적인 고통에서 구해줄수 있을까?  한분 밖에 없다. 하늘과 땅과 세상 모든 영역에 주인되신 하나님 이시다. 그 하나님은 예배안에 계시다. 예배가 풀리면 모든것이 풀린다. 예배가 막히면 모든것이 막힌다.

당신은 삶의 최우선 순위는 무엇인가? 당신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원수가 두려워하는 것

누가복음 4:1-4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설교요약>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직후 하늘로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 라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이 일 직후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이끄심을 받았다. 왜 하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 머무르게 하셨을까?

이유 -  떡 만이 아닌 말씀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 가운데로 인도되셨다.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고 맑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이 세상 육신의 자랑, 안목의 정욕, 쾌락의 삶이 이때 거룩함과 순결과 사랑의 삶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하고 있을 때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하러 왔다. 

유혹 - 하나님의 음성 듣지 못하게 하도록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특별한 시간을 가질 때 마귀는 특별히 예수님이 거의 잡수시지 않기로 작정한 기간의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유혹했다.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예수님은 얼마 전에 세례를 받으시면서 하늘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 그러나 마귀는 그래도 다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유혹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할 때 내면에 들려오는 마귀의 음성을 잘 분별하고 대적해야 하는 이유를 확인시켜 준다. 이것은 아빠와 아들 엄마와 딸이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데 낯선 사람이 와서 아들과 딸에게 '네 아빠 엄마 맞아 정말?' '이렇게 닮은 구석이 없는데' 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마귀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고 육신의 본능과 탐욕대로 살라고 부추긴다.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라고 속인다.  예수님은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다. 그러나 돌을 떡으로 만들며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하시지 않으셨다. 특별히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핑계 대며 돌을 떡으로 만들며 합리화시키지도 않으셨다. 인간적인 욕정과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사셨기 때문이다.

떡이 아닌 말씀으로 사는 방법 
1) 입을 하나님께 드리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기를 원하신다. 
2) 열방을 두려워하지 말고 파괴하고 세워라. 하나님의 말씀이 입을  통해 마음에 들어오면 파괴할 것이 보이고 다시 세울 것이 보인다. 
3) 맞서게 하시는 은혜. 세 번째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내가 너를 보호하고 함께 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당신은 사단이 파괴한 하나님의 창조물을 되살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떡이 아닌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다. 원수가 두려워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