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허문 삶

누가복음 5:1-11
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설교요약>
삶의 벽을 쌓는 사람들의 4 가지 특징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지만 주님을 사랑하거나내면에 그 은혜가 스며들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증상들이 나타난다. 첫째. 자신의 일용할 양식과 예수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베드로와요한의 무리처럼 수입과 생존에 필요한 공급에대해서는 예수님은 아무것도 해줄수 없는 분이라고 단정짓고 바라보지 않는다.  둘째. 사람들의 영혼의 문제보다 자신들의 수익이 더 관심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며칠전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바다에서 고기잡고 그물을깁고 있을때 부르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람을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바로 옆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도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셋째. 주님을 한결같이 따르지 않는다. 네째. 아무리 수고해도고기가 없다. 그물은 천국과 같다고 했다. '(마:13:47) 그물에 고기가 채워지듯 마음에 천국이 채워진다. 그런데 아무리 이땅에서 성실하게 수고하며 살아도 주님이 없으면 그물에채워짐이 없다. 

3년 후의 삶의 3가지 특징 
3년 후의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첫째. 배에 7명의 제자들이 타고 있었다.  예수님을 판 가롯유다를 제외하고 11명 중에 7명이 한 배에 타고 있었다.  3년 전 에는  배가 두대였고  각각의 배에
베드로-안드레 요한-야고보가  타고 있었다. 그 당시 어선의 장비가  비쌌기 떄문에 어부들은 보통 협동조합에서 동업자들과 함께  일했거나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가족들이 함께 일했다고 한다. 고기를 잡았을때 그것의 수입을 나눌 사람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 제자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도우며 가족보다도 더 진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베드로는 배와 고기를뒤로하고 새벽 바다에 뛰어들었다. 3년전 베드로는 예수님이 옆에서 말씀을 전하는데도 바라보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3년 후에는 자신이 원했던 고기를 많이 잡았음에도 그것보다 예수님이 보고싶어 차가운 새벽 바다로뛰어 들었다. 
셋째. 영혼을 낚는 어부의 마음이 있다. 3년전베드로는 사람보다 고기에 관심이 더 많았다.그런데 뭍에 올라운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사랑하느냐' 라고 하실때 '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했다. 그때 주님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3번에 걸쳐 말씀 하셨다. 이것은 문자적인 동물 양이 아니라 한 영혼을 양으로 비유한 것이었다. 

3년전과 삶이  달라진 이유 
채워짐 
베드로는 채워짐을 경험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예수님과 잃어버린 영혼들에 관심없이 영혼없는 얼굴로 그물을 씻고 있을때 그에게 먼저 다가 가셨다. 그리고 그의 배를 바다에 띄우라고하셨다. 그리고 그 배에 올라타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시 내면의 그물이 채워지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그의 육신적인 필요도 채우셨다. 3년후에는 오른쪽에 던지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던지라고 하는 곳에 던지면 사방의 물고기들이 그 그물 안으로 쏜살같이 달려와 잡혀진다. 고기는 잡는것이 아니라 잡혀지는 것을 베드로는 그날 이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했다.
찢어짐 
베드로는 찢어짐을 경험했다. 베드로가 3년 후에 바뀐 또다른 이유는 채워짐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베드로는 이날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순종했을때 그물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데 그물이 찢어지는 것도 같이 경험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때로 모두 빠져나가버리는 경험을 할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다시 우리 삶에 채워지고 얻어진것이 나의 능력이나 행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배우게된다. 우리는 주님 주신 것이 다시 찢어지는 경험을 할때 이 찢어짐을 통해 두가지 반응을 주께 드려야 한다. 


주께 드릴 두가지 반응 

첫째.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것 
히브리서 5장8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겸손의삶을 사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크고 작은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원하신다. 순종은 내가 원한 정반대의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 아들이라도 거룩한 삶으로 간구했다 
히브리서 5장7절을보면  예수님은 거룩 그 본체셨다. 그럼에도 인간의 몸을 입고 어떻게 살고 기도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 주셨다. 심한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기도했다. 특히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거룩한 삶, 경건한 삶, 신실한 삶을 추구하셨다. 

다른 삶

누가복음 4:38-44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40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히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러라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설교요약>
베드로의 변화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예수님은 그의 가정에 풀리지 않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셨다. 우리는 베드로가 그물과 배와 고기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른 사실에 주목하지만, 중요한 점은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어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회당에 들어간 일이다. 베드로가 아무리 예수님을 위해 모든것을 희생하고 따랐다 하더라도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고 예배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계속적인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희생은 베드로의 또 다른 자기 자랑과 자기 의가 되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변화는 그가 주를 위해 무엇을 포기했나에 있지 않고 예수님이 어떻게 그의 내면을 진리의 말씀으로 채우고 영혼을 회복시켰나에 기초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면 삶은 점점 걱정과 근심과 고통의 올무에 얽매이게 되어 불행해 진다. 반복해서 주님의 말씀과 은혜를 받는 것에 집중하라. 그러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보일것이다. 우리의 삶의 키를 내려놓지 않으면 하늘에서 채워지는 것이 아닌, 땅에서 오는 것으로 채워진다. 주님은 우리 직장, 가정, 인간관계, 애매한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짊어 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계속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주님께 내어 드리기 위한 예수님의 삶의  원리
첫째. 모든 사람들을 사역의 대상으로 보라.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나와 왜 갑자기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께 시몬의 장모의 병을 고쳐달라고 아주 절박하게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시몬 베드로의 장모님을 위해 애걸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해가 지고 있는 시각에도 마을로 들어가서 자신의 일처럼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다. 평생 고통받는 사람들이 치유되어 천국을 누리기 원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로 충만해 질때 우리의 것을 희생하고 넓은 가슴으로 사람들을 품고 사랑하며 산다. 그러나 어떤 때는 반대로 누군가에게 유치해 지고 이기적이고 나의 권리를 요구하며 불평하고 미움을 갖으며 다시 나의 자아가 살아난다. 중요한  이유  한가지는 누군가에게는 주는 것 보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역의 대상으로 대하셨다. 그들로 부터 무엇을 받으려고 하거나 기대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그냥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든 사람을 우월감 없이 사역하는 마음, 일일이 예수님 처럼 나의 손을 얹어 주어야 할 존재로 생각하고 대하면 우리의 내면이 채워짐을 얻게 될 것이다.

둘째. 거룩한 일의 중심에서 어둠의  존재들에게 높임 받고 인정받는 것을 거부하라.
계속해서 하늘의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어둠에 의해 인정받고 높임받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단수)의 졸개들(귀신들-복수)이 자신을 알아보고 소리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을때 그것을 꾸짖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마귀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많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높이는 것으로 혼동할수 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던 마귀는 예수님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동안 떠났다고 했다. 사람들의 높임 받고 싶어하는 죄악 된 본성은 때로 그것이 어둠이고 악한것을 안다해도 그런 것과 결탁하고 자신의 삶의 일부를 내어준다. 사람들은 지극히 거룩한 영적인 일을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죄악된 본성이 끓어 오를수 있다. 거룩한 사역의 한 중심부에도 사단은 자신을 드러내고 높아지고 싶은 마음을 자극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꾸짖을 때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는 우리의 삶을 통해 더욱 강렬하게 세상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많은 어둠의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한다.

셋째, 사람들이 원하는 때를 쫓지 않으시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때를 따라 사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전날 저녁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데려와서 축복을 받게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마음속에는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조종하려는 미성숙이 함께 존재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만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수많은 군중을 뒤로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복음으로 풀어주고 축복하기 위해  새로운 장소를 향해 떠나셨다.예수님의 결정의 기준은 자신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셨다. 세상의 대다수는 자신의 유익을 따라 얼마든지 모든것을 결정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 마져도 기회주의적인 삶을 쫓아가곤 한다. 언제든 사랑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때를 묻지 않고 버리고 자신의 명성과 삶에 물리적인 유익을 주는것은 주저하지 않고 덥석 문다. 그러나 이런 삶의 마지막은 큰 고통으로 자신을 스스로 찌르는 결과를 낳는다.

자신이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는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3가지 점검
1) 좋은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기다린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것이 오지 않는것을 경험하고 크게 실망하고 낙심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를 따라사는 사람은 다시 일어나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실것을 기대한다. 당신이 그토록 원했는데 분명하게 눈에 볼수있도록 주지 않는것이 있을것이다. 그때 다시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실것을 기대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살고 있는 것이고 당신 믿음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 때에 맞는 것을 주실것을 믿는다.
때에 맞는 것은 주변 것들과 조화를 이룬다. 주변 사람들과 여건에 자연스럽게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인위적인 창조는 주변 것들과 계속 마찰과 분리와 상처와 불쾌함을 남기게 된다. 따라서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 주변의 정황과 사람들을 계속 무시하지 않고 살피는 삶을 산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때를 구하며 사는 사람이다.

 3) 추수할 열매가 있게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때에 맞게 어떤 것을 주실 때에는 어떤 열매가 드러난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연결되고 그분으로 부터 축복을 받는 열매들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갈수록 더 큰 열매들을 추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거절과 사모함

누가복음 4:14-37
14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설교요약>
그리스도인이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는 첫째, 승리 후에 더 깊은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사적인 영광”을 모르기 때문이고 둘째, 승리한 자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공적인 영광”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적인 영광
저자 요한의 청년 때의 믿음을 가장 성숙한 위치에 두고있다. 청년 믿음은 먼저 싸워서 강해진 믿음이다. 전쟁에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실전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 보다 더 강하고 담대하다. 청년 믿음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내면에 거하고 있다. 늘 죄사함 받는 것에 머물러 있는 어린아이의 믿음에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 아비의 믿음으로 나가야 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는데 정작 영적인 공격이나 분별력은 점점 떨어져 어둠과 유혹에 잘 속는 노쇠해 지는 아비의 믿음에 머물러 있지 않아야 한다. 이것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흉악한 사단을 분별하고 파괴하며 하나님의 임재와 생명이 어둠의 영혼과 세상 가운데 흘러가게 하는 통로가 되는 청년의 영성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아이의 믿음에서 아비의 믿음으로 아비의 믿음에서 청년의 믿음으로 계속 성숙해 가면 더 큰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청년의 믿음을 가지고 사단의 유혹과 공격을 향해 싸워가다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내면 안에서 온전해 진다. 온전 하다는 것은 그 사랑이 더 깊어지고 더 예수님 같은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우리 안에서 사단의 유혹을 대적하고 죄와 싸워 이기면 이길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우리 안에서 더욱 커지고 그 사랑은 두려움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이런 모든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영적 싸움을 그치거나 포기하지 청년의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어진다. 

공적인 영광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오셨고 가장 먼저 회당에 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회당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시기에 짐승으로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없어 성경 봉독과 강해 및 기도, 그리고 축도로 예배를 드리는 데에서 유래했다. 저자 누가는 예수님이 들어간 회당을 두 지역, 나사렛  회당 사람들과 가버나움의 회당 사람들을 비교하며 소개한다. 나사렛 회당의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거절하고 무시하는 강퍅한 마음을 가졌고,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았으나, 그분의 외적인 출신성분 때문에 거절했다. 그리고 심지어 화가 나서 그 동네 산 낭떠러지로 끌고가 밀쳐 죽이려고 했다. 예수님은 나사렛의 갇히고, 눌리고, 보지 못하고 가난한  영혼들을 살려 주시려고 그곳에 가셨는데 단 한사람도 그런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했다. 반면, 가버나움 회당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모했고,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였고, 예수님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골방의 불은 사방으로 퍼진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혼자였지만 그 광야의 불이 가버나움으로 흘러왔다. 우리의 기도와 예배는 화려하지 않고 소수만이 모일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모임이 성령에 붙들렸다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런 모임들은 또 다른 영혼들을 살리고 회복시키고 일으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 되리라'(눅10:3) 광야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광야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면 외로운 모임, 작은 모임이라 할지라도 그 불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곳으로 퍼져 나간다. 하나님은 오늘도 가버나움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그들에게 놀라운 축복들을 부어 주시고 또 부어 주신다. 그 불은 또 다른 곳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당신은 거절 하는가? 사모하는가?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1부> | 은혜 받는 감람나무<2부>

<1부 - 배현석 전도사님>
마가복음 5:1-20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2부- 양정상 목사님>
나훔 1:9-15
9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0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13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14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설교 요약>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었다. 나훔은 남 유다 요시야 왕 때 선지자였다. 요시아는 8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우상을 버리고 성경을 정리하는 종교 개혁을 통해 남 유다 를 하나님이 기뻐하는 나라로 회복 시켰다.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남 유다도 두 번이나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이 당시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였으며, 남 유다의 히스가야는 하나님이 기뻐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히스가야가 우상과 산당을 없애는 것을 보고 앗수르 왕은 히스가야가 마치 자기 신을 부순다고 여기며 비웃었다. 그러나 3천년 동안 강국이던 앗수르는 작은 남 유다를 결코 함락하지 못했다.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인들이 서로를 해치도록 교란시키시어 185,000명이나 죽이셨기 때문이였다. 나훔서 3:17의 기록처럼 앗수르는 1845년 발굴 전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던 나라였다. 또한 나훔의 예언대로 그 시대 최강국이던 앗수르에 대한 심판이 성취되었으며, 이 일은 억압받던 남 유다에게는 구원이 되었다. 곧 앗수르의 멸망은 남 유다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되었다.

 바울 또한 로마서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죄와 사단으로부터 건지고 사망에서 해방시키심을 아름다운 소식이라 일컬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단을 심판하시며 우리를 구원함에 있다. 하나님의 성품엔 공의와 사랑(은혜)이 공존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 받았기에 그 분의 공의를 실감하지 못한다.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지불한 대가에도 공감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은혜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 분의 이끄심을 바라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오늘도 십자가에 못밖힌 손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기뻐하시기 위해 노크하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선과 의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갈 수 없는 이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 오셨다. 세상 사람들은 구원을 원치 않으나 죄인이기에 구원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참 감람나무에 접붙인 돌 감람나무의 비유를 통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즉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이 구원 받은 일을 가지고 구원 받은 유대인들과 은혜를 저버린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우선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교만해선 안된다고 경고했다. 교만한 불신 유대인도 벌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이방인 그리스도의 교만은 더욱 가차 없이 벌하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였다. 여기서 심판 받은 앗수르가 누구인지 되짚어 보자. 앗수르는 노아의 아들 함의 자손인 니므롯의 후예들이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괴롭혔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앗수르의 조상 함은 노아와 함께 방주 속에 있었다. 앗수르가 만약 나의 가족이라면 앗수르의 심판이 당연하게 느껴질까? 아니다 그들이 우리의 가족이라면 우리의 기도는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바울이 참 감람나무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인 비유를 들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팔레스타인 농사법에 관한 옛 문서를 보면 이렇게 접붙임을 하는 이유는 돌 감람나무에서 열매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열매 못매는 참 감람나무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이면 생기 잃은 참 감람나무가 다시 살아난다고 한다. 즉, 이방인을 하나님 백성으로 살릴 뿐 아니라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도 함께 살리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말한 것이다. 탕자의 이야기에서도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를 용서하고 사랑했다. 그 모습에 불평하는 탕자 형도 본인이 늘 성실하다는 교만을 버리고 탕자와 행복하게 살기를 아버지는 바랬을 것이다. 우리도 원래 탕자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탕자 형이 된 사람이다. 우리가 행하고 섬긴 것에 대해 탕자에게 자랑하고 교만할 것도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참 감람 나무 같은가? 돌 감람 나무인가? 답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참 감람나무가 되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선택받을 수 밖에 없는 특별함이 이스라엘 백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뿌리 내리고 있었기에 참 감람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도 앗수르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옮기시어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 감람나무가 된 것도 은혜이다. 바울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주의해야 할 두 가지도 살펴보자. 첫째, 특권의식이다. 둘째, 은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영혼들로 인해 주시는 은혜를 찾자. 그 영혼들이 열매 없는 우리를 깨울 것이며 우리가 있었던 구원의 은혜를 회복시킬 것이다.

꼭대기에서 안으로

누가복음 4:9-13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설교요약>
마귀의 세 번째 유혹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시편 91장 11-12절 말씀을 인용해서 그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리라고 유혹한다. 왜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것일까? 민수기 10장 11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인도한 불과 구름기둥이 증거의 성막위에 있었다. 그 증거의 성막은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를 의미하는데 마귀가 예수님을 세운 성전 꼭대기가 바로 불과 구름기둥이 임재했던 위치와 같다. 즉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이스라엘의 주인이신 그분의 능력의 근원지에 예수님을 세운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 세운 이유
첫째는 십자가의 조건없는 사랑을 짓밟고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왕의 자녀의 권세를 파괴하기 위함이다. 거짓의 본체인 사단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진실한 관계와 교제를 끊기 위해서사랑의 확인이라는 전략을 시도한다. 또한 사단은 시편 91장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매개체로 오인하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조건적인 사랑을 하도록유도한다. 사실 사람들도 깊은 성숙에 들어가면 조건이 무의미해지는데 허물러 하나님이 우리들을 향한 사랑은 절대로 조건이 성립이 안 된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만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속죄를 위한 복잡한 번제의 과정과 몇 번에 걸쳐 옷을 갈아입고 몸을 씻고 거룩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거룩하게 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보여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덮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를 수있게 해주는 완벽한 거룩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은 조건이 성립될 수 없다. 십자가에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우리의 죄를 덮어 주셔서 그분의 임재 앞으로 나오게 해주신 것은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이다. 그런데 사단은 이런 지성소, 즉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짓밟고 서서 다른 사랑의 조건을 계속해서 제시하라고 한다.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성취한 것이 자신이 하나님에게 가치 있고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여기게 유혹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할 능력을 분산시킨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이 광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배웠다. 성령님이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신 목적은 마귀의 유혹을 받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에 집중하면서 곧 시작될 3년 반의 공생애를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마귀는 마지막 시험으로 예수님이 가진 능력과 열정을 헛된 것으로 만들라고 했다. 즉 자신만이 가장 거룩하고 가장 영적이고 가장 신령한 존재임을 알리는데 관심을 두게 해서 예수님의 능력을 탐욕의 도구로 전락시키려 했다. 그럼 예수님이 어떻게 마귀를 이기셨는지 보자.

예수님의 승리의 방법
첫째는 결핍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자.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6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신다. 이 말씀 속에는 매 순간 출애굽기처럼 응답-결핍-응답-결핍-응답-결핍이 계속 반복될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되 한 번으로 그치지 말고 계속 신뢰하라는 의미가 있다. 

둘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고 성전 꼭대기로 올라가지 마라. 사단은 성전 꼭대기에 선 사람들, 즉 높은 마음, 자신이 가장 영적이라고 우월한 마음을 갖도록 유혹한다. 이런 마음이 들면 '사단아 물러가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선포해야 한다. 성전은 안으로 들어가는 곳이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곳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매 순간 인정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들의 예배와 사랑을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 진심의 예배와 사랑을 드릴 때 그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조건 없는 사랑, 완벽한 기쁨, 평안이 임해 영화롭게 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의 길을 가게 한다. 누군가를 섬기고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것을 고난이라고 하시지 않고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라고 '영광'이라고 하셨다. 그런 고난은 부활이 있고 열매가 있고 생명이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난다. 당신은 성전 꼭대기를 향하는가? 성전 안을 향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