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부대

누가복음 5:35-39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설교 요약>
새 옷과 새 포도주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헌 옷과 헌 부대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의미와 정신인 사랑을 놓치고 자신들의 잘못된 해석으로 만든 인간의 전통임을 알려 주신다. 따라서 새 옷과 새 포도주는 율법을 완성케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셨고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이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고 낙심한 베드로와 외로운 삶을 살던 나병환자, 평생 누어서 삶을 연명했던 중병병자에게 예수님은 다가갔고 그들에게 사랑을 보여주셨다. 이것이 바로 조건없은 사랑, 거룩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신 아가페의 사랑이다. 빌보드 차트 hot100 중에 10위에 오른 BTS의 Fake Love를 통해서 세계의 젊은이들이 진실된 사랑에 대한 갈망이 그들의 내면 속에 있음을 증명한다. 진실된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며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다. 그럼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고 거짓 없는 진실한 사랑을 하려면 아가페의 사랑을 만나야 하며 그 속에서 성화되어야 한다.

새 부대
첫째는 거듭남이다

새 옷과 새 포도주의 비유를 통해서 이것이 사랑의 율법인 것을 안다. 그럼 새 부대는 무엇인가? 새 부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통은 양을 죽여서 그 가죽으로 만든다. 즉 새 부대와 같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려면 먼저 죽었다가 살아나야 한다. 니고데모와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베드로, 백부장도 모두 예수님을 믿을 때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새 부대가 되었다. 새 부대 안에 거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거부한다면 그 안에 있는 영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새 부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아래에 있는 5가지 특징을 보이는 거듭난 사람들이다.
1-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아드린다.
2- 형제, 자매들을 사랑한다.
3- 예수님이 신성을 가지고 육체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믿는다.
4- 세상을 이긴다.
5-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둘째는 가치 있는 말과 삶에 집중한다
새 포도주는 성령님으로 비유된다. 오순절 성령사건 이후로 계속해서 사도들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부어졌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 받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교제하고 서로의 것을 나누고 기도와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서 오신 것이다. 요점은 부어주신 새 포도주는 누군가를 위해서 가치 있게 사용됨으로 새 부대가 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새 부대가 메말라 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것을 여름철의 시냇물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것은 속이는 시냇물이다. 이스라엘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지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아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너무 힘들거나 속이는 시냇물이 지속될 때 그 화살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다. 당신의 삶에 속이는 시냇물은 무엇인가? 재정, 가족, 직장, 친구, 하나님의 사람들 아니면 자기 자신인가?

예레미야 15장 19절의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첫째는 가치 없는 말이 아니라 가치 있는 말씀을 전하라
즉 하나님은 속이는 시냇물 같은 사람이나 상황들을 만날 때에도 가치 있는 말씀을 전하며 살라고 하신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 삶의 거짓과 속임의 언어, 행동들을 골라내고 스스로 더 깊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시간으로 삼을 수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속이는 시냇물 같은 시기에 더욱 가치 있는 금과 다이아몬드로 바꾸고 계신다.

둘째는 사람들을 쫓지 말고 그들을 돌아오게 하라
가치 있는 말씀을 전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면 진리가 새 부대에 가득 채워진다. 진리로 내면에 채워지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면 우리의 내면에 진리로 채우는 일에 더 많은 마음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우리의 내면에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채워질 때 우리는 사람들을 연연하며 쫓아가게 된다. 우리의 영혼이 진리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지면 그 진리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입으로 삶으로 전달하게 된다.

그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삶을 하나님의 입이 되게 할 것이다. 당신은 새 부대가 되어가고 있는가?

예수님처럼

누가복음 5:27-35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설교 요약>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죄를 사하러 오신 분이심을 가버나움의 중풍병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위대한 성자 정도로 본다면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갈등이 생기면서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는 자들까지 정죄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분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되면 변화가 시작된다. 우리는 세리 레위를 통해서 예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예수님의 관심
첫째는 죄인의 회심- 가버나움에 살던 레위는 이미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알고 있었지만 삭개오처럼 예수님께로 갈 용기가 없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경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세금을 부당하게 거두는 세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문 27-28절에 보면 예수님이 그를 부를 때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말씀을 보면 베드로, 나병환자. 중풍병자 그리고 레위도 예수님을 만나 모두 죄 사함을 경험했던 죄인들이었다. 또한 교회는 죄인들이 오는 곳이며 자신들이 죄인 됨을 보고 회개하고 죄 사함을 경험하고 거듭나는 곳이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한 영혼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했는가에 가장 큰 관심이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관심이다.

둘째는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것- 29절에 보면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서 큰 잔치를 연다. 즉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영혼이 기뻐하게 된다. 누가 복음 15장에 양 백 마리가 있는 목자가 한 마리를 잃고 찾았을 때와 열드라크마 중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그리고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와 여인 그리고 목자는 가장 먼저 잔치를 벌였다. 이것이 하늘의 천사들의 기쁨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며 예수님의 기쁨인 것이다. 레위의 기쁨과 잔치는 그가 만든 기쁨이 아니고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음 맛보는 기쁨인 것이다.

셋째는 죄인의 회심이 죄인들의 나아옴으로 이어지는 것- 29절에 보면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죄인을 부르시고 사랑을 주셨는데 그 한 사람 레위를 통해서 수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회심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며 예수님의 관심이다. 그러나 이런 기쁨과 영혼이 성령충만할때 그것을 방해하는 세상의 소리가 있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이 무언인지 예수님의 삶의 원리를 통해서 보자.

내면에서 비방의 소리가 들릴 때
첫째는 죄인들을 병자로 보라- 30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한다. 이 비방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소리지만 우리의 내면에도 이런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죄인들끼리 서로 이해할 것 같지만 그들 사이에도 죄의 등급을 정하고 서로를 무시한다. 이럴 때 우리의 내면에는 네가 뭐가 부족해서 이런 죄인들과 상대하니 라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같은 병자들을 고치시기 원하셨다. 즉 죄인들을 병자로 보고 그들에게 의사가 필요함을 인정하셨다. 그럼 우리들 마음에 불쌍한 마음, 즉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다.

둘째는 혼인 집 손님으로 보라- 33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금식하지 않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식탁에 몰려온 죄인들을 혼인집 손님들로 보았다. 당시에 혼인잔치는 우울과 슬픔이 아닌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에서 어떤 임금의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종들이 길가로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는데 잔치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 어두운 곳으로 쫓아내는 기준이 선한 자나 악한 자가 아닌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인 것이다. 바로 이 예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과 은혜의 옷인 것이다. 나는 택함을 받았는가의 기준은 단순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의복을 입는 것이다. 이 의복의 의미는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음을 의미한다. 즉 모두가 죄인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선인과 악인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 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처럼 사는 삶이다.

주께 나올 수 없을 때 나오라

누가복음 5:12-26
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14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설교요약>
예수님이 한 동네에 계실때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와 엎드렸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나병환자는 정상적인 사람들 사이에 나타날수 없게 되어있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올수 없는 2가지 불가능한 장벽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나병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병이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킬수 있는 위험한 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가 예수님께 나올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셨다. 꾸짖지도 않으셨다. 많은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13절에 보면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라고 기록했다. 따라서 예수님이 손을 쉽게 대실수 있는 가까운 거리까지 나병환자가 온것을 알수있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삶의 문제가 너무 크고 힘들다 보면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올 힘조차 상실하게 될때가 있다. 주님께 가기도 전에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거나 영구적인 해결이 안될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나병환자의 풀수없는 불치병 문제를 풀어주신것을 주목해야 한다. 24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 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예수님께 나가도 이 문제는 절대 어떻게 해결되지 않을거야 라는 산같은 문제는 무엇인가? 그러함에도 주님께 나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이라는 말을 한마디 사용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그것을 믿음으로 보신다. 이제 당신은 예수님께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수 있다. 그럼 어떻게 나가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될것이다. 

첫째. 솔직하게  나가라 

나병환자도 중풍병자도 또 다른 공통점은 자신들을 감추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간것이다. 나병환자는 자신의 몸을 가리기 위해 그럴듯한 옷이나 장식품을 구해 가릴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운 나라기에 태양을 가리기 위해 긴 세마포 치마 같은 것을 입는 나라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정상적인 사람처럼 어느 정도는 위장할수 있었다. 중풍병자는 늘 자신이 드러누어 있던 그 침상에 누운채 예수님께 나왔다. 따라서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는 보기 힘들고 악취나는 모습 그대로 나왔다.이 사람들 자신도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었을 것이다. 예수님께 나올때 침상도 흉칙한 자신의 모습도 감추지 말아야 한다. 나병에서 정결케 된 사람은 몸의 털을 모두 밀고 물로 몸을 씻고 처음으로 이스라엘 진영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자신의 텐트(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7일 동안 야영을 하게 된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진영안에 즉 교회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7일 야영은 그의 삶을 성결케 하는 시간들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집을 떠나 마음껏 집없이 떠도는것을 자유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반대다. 진정한 자유는 집안에 있다. 가장 자유로울 때는 집안에 있을때다. 우리의 영혼의 집은 교회다. 천국이다. 이때 우리의 영혼은 가장 자유하다. 이 집 안에서 우리는 반복해서 몸을 씻고 잘라낼것을 잘라낸다. 7일째 다시 몸을 씻고 옷을 빨고 머리카락, 수염, 눈썹까지 모두 깍아내게 한다. 두번째 씻음과 잘라냄이다. 계속적인 성화를 의미한다. 특히 골방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 뿐만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서로의 나눔을 누설하지 않는 소그룹이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도 솔직한 나감이다. 혹은 자신의 상황을 진실하게 나누며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하늘의 문을 여는 솔직한 태도다. 병이 낫기를 위해서는 첫째, 서로에게 죄를 고백하고 둘째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둘째.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선함을 바라보며 나가라 

사람들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는 것을 금기시 했고 그런 생각조차 부정하게 여겼다.나병환자가 가까이 오면 돌을 던지며 증오하고 조롱했다. 그런데 오랜세월 나병을 앓으면서 이런 대우를 받으며 산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이 사람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절망' 이라는 단어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람은 예수님께 원망과 증오의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수 있나이다 하니'(12절) 라고 고백했다. 이 말속에는 '주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이라는 뜻도 들어있다. 이것은 자신이 앓고 있는 이 병도 주님의 지배아래 있고 섭리아래 있음에 대한 고백이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마음도 예수님에 대해 그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 긍정적이고 선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할수 없는 반응이었다. 나병환자도 중풍병자를 데리고 사람들도 공통점은 그 생각이 소망적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꼭 고쳐주실것이라는 선한 이미지가 있다. 주변 사람들이 도와 줄것이라는 선한 이미지가 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기뻐하신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는 부정적이고 쓴뿌리로 가득한 사람들의 내면을 먼저 바꾸신다.예수님은 나병환자가 오기전에 생각한 대로 아무도 손대기 싫어하는 나병환자를 거침없이 즉시 손을 내밀어 만지셨다. 그리고 '내가 원하니 깨끗함을 받으라'(눅:5:13)  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가 생각한 대로 깨끗함을 받았다. 중풍병자는 그의 친구들의 생각대로 죄사함을 받았다. 그리고 침상에 의해 지배받던 그가 자신의 침상을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도 그것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 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눅:5:26) 한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주께 나가면 그 영광은 더 멀리 더 높게 더 오래 확장된다.  친구들이 예수님을 생각한 대로 되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병든 친구를 메고온 그 선함을 볼때 그들은 아마도 뜯은 지붕을 다시 더 튼튼히 고쳐주고 갔을 것이다. 

주께 나병환자 처럼 중풍병자 친구처럼 주께 나올때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볼것이다.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될것이다. 누군가 당신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것이다.

벽을 허문 삶

누가복음 5:1-11
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설교요약>
삶의 벽을 쌓는 사람들의 4 가지 특징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지만 주님을 사랑하거나내면에 그 은혜가 스며들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증상들이 나타난다. 첫째. 자신의 일용할 양식과 예수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베드로와요한의 무리처럼 수입과 생존에 필요한 공급에대해서는 예수님은 아무것도 해줄수 없는 분이라고 단정짓고 바라보지 않는다.  둘째. 사람들의 영혼의 문제보다 자신들의 수익이 더 관심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며칠전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바다에서 고기잡고 그물을깁고 있을때 부르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람을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바로 옆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도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셋째. 주님을 한결같이 따르지 않는다. 네째. 아무리 수고해도고기가 없다. 그물은 천국과 같다고 했다. '(마:13:47) 그물에 고기가 채워지듯 마음에 천국이 채워진다. 그런데 아무리 이땅에서 성실하게 수고하며 살아도 주님이 없으면 그물에채워짐이 없다. 

3년 후의 삶의 3가지 특징 
3년 후의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첫째. 배에 7명의 제자들이 타고 있었다.  예수님을 판 가롯유다를 제외하고 11명 중에 7명이 한 배에 타고 있었다.  3년 전 에는  배가 두대였고  각각의 배에
베드로-안드레 요한-야고보가  타고 있었다. 그 당시 어선의 장비가  비쌌기 떄문에 어부들은 보통 협동조합에서 동업자들과 함께  일했거나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가족들이 함께 일했다고 한다. 고기를 잡았을때 그것의 수입을 나눌 사람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 제자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도우며 가족보다도 더 진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베드로는 배와 고기를뒤로하고 새벽 바다에 뛰어들었다. 3년전 베드로는 예수님이 옆에서 말씀을 전하는데도 바라보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3년 후에는 자신이 원했던 고기를 많이 잡았음에도 그것보다 예수님이 보고싶어 차가운 새벽 바다로뛰어 들었다. 
셋째. 영혼을 낚는 어부의 마음이 있다. 3년전베드로는 사람보다 고기에 관심이 더 많았다.그런데 뭍에 올라운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사랑하느냐' 라고 하실때 '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했다. 그때 주님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3번에 걸쳐 말씀 하셨다. 이것은 문자적인 동물 양이 아니라 한 영혼을 양으로 비유한 것이었다. 

3년전과 삶이  달라진 이유 
채워짐 
베드로는 채워짐을 경험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예수님과 잃어버린 영혼들에 관심없이 영혼없는 얼굴로 그물을 씻고 있을때 그에게 먼저 다가 가셨다. 그리고 그의 배를 바다에 띄우라고하셨다. 그리고 그 배에 올라타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시 내면의 그물이 채워지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그의 육신적인 필요도 채우셨다. 3년후에는 오른쪽에 던지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던지라고 하는 곳에 던지면 사방의 물고기들이 그 그물 안으로 쏜살같이 달려와 잡혀진다. 고기는 잡는것이 아니라 잡혀지는 것을 베드로는 그날 이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했다.
찢어짐 
베드로는 찢어짐을 경험했다. 베드로가 3년 후에 바뀐 또다른 이유는 채워짐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베드로는 이날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순종했을때 그물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데 그물이 찢어지는 것도 같이 경험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때로 모두 빠져나가버리는 경험을 할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다시 우리 삶에 채워지고 얻어진것이 나의 능력이나 행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배우게된다. 우리는 주님 주신 것이 다시 찢어지는 경험을 할때 이 찢어짐을 통해 두가지 반응을 주께 드려야 한다. 


주께 드릴 두가지 반응 

첫째.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것 
히브리서 5장8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겸손의삶을 사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크고 작은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원하신다. 순종은 내가 원한 정반대의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 아들이라도 거룩한 삶으로 간구했다 
히브리서 5장7절을보면  예수님은 거룩 그 본체셨다. 그럼에도 인간의 몸을 입고 어떻게 살고 기도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 주셨다. 심한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기도했다. 특히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거룩한 삶, 경건한 삶, 신실한 삶을 추구하셨다. 

다른 삶

누가복음 4:38-44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40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히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러라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설교요약>
베드로의 변화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예수님은 그의 가정에 풀리지 않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셨다. 우리는 베드로가 그물과 배와 고기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른 사실에 주목하지만, 중요한 점은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어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회당에 들어간 일이다. 베드로가 아무리 예수님을 위해 모든것을 희생하고 따랐다 하더라도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고 예배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계속적인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희생은 베드로의 또 다른 자기 자랑과 자기 의가 되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변화는 그가 주를 위해 무엇을 포기했나에 있지 않고 예수님이 어떻게 그의 내면을 진리의 말씀으로 채우고 영혼을 회복시켰나에 기초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면 삶은 점점 걱정과 근심과 고통의 올무에 얽매이게 되어 불행해 진다. 반복해서 주님의 말씀과 은혜를 받는 것에 집중하라. 그러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보일것이다. 우리의 삶의 키를 내려놓지 않으면 하늘에서 채워지는 것이 아닌, 땅에서 오는 것으로 채워진다. 주님은 우리 직장, 가정, 인간관계, 애매한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짊어 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계속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주님께 내어 드리기 위한 예수님의 삶의  원리
첫째. 모든 사람들을 사역의 대상으로 보라.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나와 왜 갑자기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께 시몬의 장모의 병을 고쳐달라고 아주 절박하게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시몬 베드로의 장모님을 위해 애걸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해가 지고 있는 시각에도 마을로 들어가서 자신의 일처럼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다. 평생 고통받는 사람들이 치유되어 천국을 누리기 원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로 충만해 질때 우리의 것을 희생하고 넓은 가슴으로 사람들을 품고 사랑하며 산다. 그러나 어떤 때는 반대로 누군가에게 유치해 지고 이기적이고 나의 권리를 요구하며 불평하고 미움을 갖으며 다시 나의 자아가 살아난다. 중요한  이유  한가지는 누군가에게는 주는 것 보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역의 대상으로 대하셨다. 그들로 부터 무엇을 받으려고 하거나 기대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그냥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든 사람을 우월감 없이 사역하는 마음, 일일이 예수님 처럼 나의 손을 얹어 주어야 할 존재로 생각하고 대하면 우리의 내면이 채워짐을 얻게 될 것이다.

둘째. 거룩한 일의 중심에서 어둠의  존재들에게 높임 받고 인정받는 것을 거부하라.
계속해서 하늘의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어둠에 의해 인정받고 높임받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단수)의 졸개들(귀신들-복수)이 자신을 알아보고 소리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을때 그것을 꾸짖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마귀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많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높이는 것으로 혼동할수 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던 마귀는 예수님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동안 떠났다고 했다. 사람들의 높임 받고 싶어하는 죄악 된 본성은 때로 그것이 어둠이고 악한것을 안다해도 그런 것과 결탁하고 자신의 삶의 일부를 내어준다. 사람들은 지극히 거룩한 영적인 일을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죄악된 본성이 끓어 오를수 있다. 거룩한 사역의 한 중심부에도 사단은 자신을 드러내고 높아지고 싶은 마음을 자극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꾸짖을 때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는 우리의 삶을 통해 더욱 강렬하게 세상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많은 어둠의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한다.

셋째, 사람들이 원하는 때를 쫓지 않으시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때를 따라 사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전날 저녁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데려와서 축복을 받게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마음속에는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조종하려는 미성숙이 함께 존재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만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수많은 군중을 뒤로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복음으로 풀어주고 축복하기 위해  새로운 장소를 향해 떠나셨다.예수님의 결정의 기준은 자신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셨다. 세상의 대다수는 자신의 유익을 따라 얼마든지 모든것을 결정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 마져도 기회주의적인 삶을 쫓아가곤 한다. 언제든 사랑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때를 묻지 않고 버리고 자신의 명성과 삶에 물리적인 유익을 주는것은 주저하지 않고 덥석 문다. 그러나 이런 삶의 마지막은 큰 고통으로 자신을 스스로 찌르는 결과를 낳는다.

자신이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는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3가지 점검
1) 좋은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기다린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것이 오지 않는것을 경험하고 크게 실망하고 낙심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를 따라사는 사람은 다시 일어나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실것을 기대한다. 당신이 그토록 원했는데 분명하게 눈에 볼수있도록 주지 않는것이 있을것이다. 그때 다시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실것을 기대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살고 있는 것이고 당신 믿음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 때에 맞는 것을 주실것을 믿는다.
때에 맞는 것은 주변 것들과 조화를 이룬다. 주변 사람들과 여건에 자연스럽게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인위적인 창조는 주변 것들과 계속 마찰과 분리와 상처와 불쾌함을 남기게 된다. 따라서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 주변의 정황과 사람들을 계속 무시하지 않고 살피는 삶을 산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때를 구하며 사는 사람이다.

 3) 추수할 열매가 있게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때에 맞게 어떤 것을 주실 때에는 어떤 열매가 드러난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연결되고 그분으로 부터 축복을 받는 열매들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갈수록 더 큰 열매들을 추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